부엌에서 책읽기/책장을 덮으며(book review)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 추리소설 그 이상의 것

hohoyaa 2012. 3. 12. 16:09

책을 읽고 어느 한권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작품들을 모두 읽어보는 습관이 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내가 스스로 작가에게 질리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의 필력에 실망도 하게된다.

몇해 전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읽고 내가 알던 추리소설과는 사뭇 다른 인간적인 체온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매료되었었기에 연이어 '모방범'을 읽었고 기대가 너무 컸던 때문일까 '모방범'에서 미미여사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가라앉은 것이 사실이다.

 

요근래 변영주감독이 미미여사의 '화차'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해서 다시 '화차'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지난 번에는 오래전 감상이나마 하나와 상혁이의 감상에 빗대어 짧은 글을 남겼었다.

 http://blog.daum.net/touchbytouch/16847684

 

그러다보니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지하던 다른 작품 '이유'가 눈에 들어와 다시 미미여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러 전작들의 감상이 옅어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라카와 일가족 4인 살해사건'이라 불리는 대량살인사건속에 발을 디디는 순간ㅡ이럴 때 흔히들 쓰는ㅡ

당신은 추리소설 그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르포르타쥬형식을 빌어 무인칭 시점으로 기술한 책의내용은 대부분 사건이 종결된 후의 인터뷰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더구나 소설의 도입부에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경매와 버티기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어 조금은 지루할런지도 모르지만 그 부분마저도 꼼꼼히 읽어볼만하다.

겉으로는 단순히 무리한 대출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일가족 몰살사건으로 보이는 이면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이 녹아있어 추리소설 특유의 수수께끼풀기같은 두뇌게임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 만장일치로 '나오키 상'수상이 결정되었을 당시 심사위원 이쓰기 히로유키는 '현대 일본의 빛과 어둠을 드러내고,사회와 인간을 폭넓게 그린 발자크적인 작업'이라 평했듯이 미야베 미유키는 하나의 사건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인간관계를 서두르지 않고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더불어 과연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지 혈연을 넘어선 가장 숭고한 가치를 지닌 집단인지를 묻고있다.

 

작품 말미에 고이토 다카히로는 야시로 유지의 유령을 만나게 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나도 아주머니들을 죽였을까요?"

깃들일 곳이 필요한 어린 새에게 혈연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반면 어린 새가 훌훌 날아오를 시기가 오면 보살핌이 곧 굴레로 느껴지고 어떻게든 그 곳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힘이 있는 자는 쉽게 벗어날 수 있겠지만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 끝이 처참하다.

이 소설을 재미로만 읽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아라카와 일가족 살해사건'이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 가족의 붕괴와 가치관의 몰락, 물질이 우선시되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속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1996년 6월 2일 새벽.

84년 일본의 거품경제와 함께 탄생이 약속되고 거품이 꺼지는 90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어 96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것은 건설회사가 아니라 평생에 한번 내집마련의 꿈을 이루려했던 대부분의 입주자들이었다. 25층으로 이루어진 동서 고층 타워2개동과 그 중간에 자리한 중층 한개동을 포함한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는 그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가라앉아 뽀얀 물안개속에 묻혀있었다. 

거대한 바벨탑으로 묘사되는 그 곳, 염료공장이 있던 황폐한 부지에 들어선 이 25층짜리 고급 아파트는 주변의 원주민들과는 애초에 융합하지 못하는 선민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 높고 풍요로운곳에서 한사람이 떨어져 사망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 이야기가 600페이지가 넘는다.

이 작품을 읽고나니 내가 '모방범'에서 실망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개인의 역사가 다소 빈약했던 '모방범'과 달리 여기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어느 누구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아서일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니 아랫배에 묵직한 것이 들어앉아 버렸다.

 

떨어진 한사람으로부터 뻗어나온 일련의 선들이 주변을 잠식하며 빠르게 퍼져나가고 어느 순간 거대한 쓰나미처럼 중심을 향해 치달으며 핵폭탄의 섬광처럼 위로 솟아 올라 하늘을 덮어버리는 버섯구름.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형상화되던 '이유'의 이미지이다.

 

 

 

 

미야베 미유키
이유
미야베 미유키 저/이규원 역
낙원 1
미야베 미유키 저/권일영 역
모방범 1
미야베 미유키 저/양억관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