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책읽기/책장을 덮으며(book review)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hohoyaa 2012. 4. 2. 13:29

 

 

국내에 소개되는 도리스 레싱의 최신작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작가인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다섯째 아이』가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다섯째 아이』는 국내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레싱의 1988년작으로, 해외에서는 이미 <고전Classic에 해당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얻어낸 바 있다. 이 작품을 발표한 후 가진 《New York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레싱은 『다섯째 아이』를 착안하게 된 두 편의 글을 소개했다. 빙하시대의 유전자가 우리에게도 전해져 영향을 미친다는 고고학자의 글과 정상적인 세 아이를 낳은 뒤 태어난 사악한 네번째 딸 때문에 행복한 가정이 파괴되었다고 하소연하는 한 어머니의 사연을 담은 잡지의 글이 그것이었다. 이 두 편의 글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다섯째 아이』의 줄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 ― 사회생물학 논쟁을 바라보는 레싱의 시선
1960년대 런던, 아주 정상적인 두 남녀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민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이 놀리듯이 오늘날에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문란한 혼전 성관계, 이혼, 또는 혼외정사, 산아 제한, 마약 같은 것들을 거부하며 그들은 전통적 의미의 행복한 가정을 건설해 나간다. 그런 행복한 가정의 요소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핵가족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커다란 빅토리아식 집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를 낳고 사랑하는 모성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자식들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도움을 주는 부모로서의 의무가 포함된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통제 밖에 있는 이상한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어 그들의 삶을 계획했던 행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벤은 그들의 <이상적인> 가정을 파괴해 간다. 비정상적인 한 아이가 그들의 가정과 그 가정의 기초가 되었던 모든 이상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벤 같은 아이가 태어났을까 생각하면서 해리엇은 행복하게 살려는 자신들에 대한 신의 형벌일까 아니면 태고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주적 진화의 소산일까 질문해 본다.

그러나 레싱은 그 문제의 정답을 내놓으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벤과 그 무리들을 대도시 지하 어느 곳에 풀어놓음으로써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리고 우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래의 어떤 모습을 예언하고 있다. 유전공학으로 인간까지도 복제되는 세기말,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인간>의 근원과 가치에 대해 도전적이고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기괴한 아이 벤은 어떤 아이였을까?

작가연보를 보면 이 '다섯째 아이'는 1988년도에 씌여졌는데 읽는내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벤의 유전자 변이가 어떤 것인지,일테면 다운증후군이라던가 서번트증후군등등의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벤을 설명할 때 무언가 신비주의적인 색채도 있고 어쩌면 그런 장애아들을 한켠으로 밀어놓는 무책임한 사회처럼 작가도 벤에 대한 탐구를 독자에게 맡겨버리는 인상이라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우연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속에서 사랑을 하고 선물이 되거나 재앙이 될(바로 벤같은 경우) 수도 있는 출산을 하고 미래에 대하여는 끊임없이 행복을 꿈꾸면서도 늘상 외줄타기의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이 결혼이다.

간혹 평범한 삶속에 재앙이 끼어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마저도 껴안고 함께 살아가려하는 것은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의 본능적인 책임감과 위대한 모성애일 것이다.

헤리엇은 그런 모성애를 지녔는지 모르지만(모든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벤을 정신병원에서 빼내온 것을 보면) 자신의아이 벤을 다루지 못했다.

아무리 포악하고 힘이 장사라지만 헤리엇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모성애보다 두려움이 더컸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엄마로서의 책임감때문일까 벤에 집착한 나머지 나머지 아이들과 그토록 누리고싶었던 가정의 행복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만다.

 

작품을 보면 헤리엇과 데이비드 두사람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젊은이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졌고 자신들의 인생을 향락에 허비할 정도로 어리석지않은 성인입네했지만 완전한 독립은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오로지 아이들이 뛰어노는 행복한 집을 갖고 싶어 무리해서 구입한 큰집,그러나 그 큰집에 대한 대출을 다 갚기도 전에 줄줄이 태어난 아이들과 자신들의 행복을 과시하고 싶어 해마다 불러모으는 친인척들로 인한 지출. 젊은 부부의 도를 넘은 행복은 그들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하고 결국엔 다섯째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차야할 빅토리아풍의 저택은 황폐해져만 간다.

남편인 데이비드는 오래 전에 집에 대한 미련을 버렸지만 헤리엇은 끝내 자신의 이상적인 결혼생활이 완전히 산산조각나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제대로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한 헤리엇은 마지막에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벤의 존재마저도 수동적으로 부정하고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불편했다.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에 대한 투자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들 한다.

그리고 집이라는 것이 단순히 몸을 거하는 공간이 아니고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자랑거리가 되면서 집의 주인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채광좋은 널찍한 집, 곳곳이 자질구레한 물건들로 어질러져있는 대신 명품가구들이 있으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기는 요즈음 우리들이 집을 상상할 때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각종 화보에서나 봄직한 그런 집들이이다. 물론 헤리엇이 꿈꾸었던 집은-가정은 그런 물질적인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집의 노예가 되어가는 우리네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작품속 데이비드는 집이 두군데이다.

이혼한 부모가 각각의 가정을 꾸리고 있고 헤리엇은 데이비드에 비해 좀 처지는 집안 출신이라 집에 대한 욕구가 더 절실했는지는 모르겠다.

헤리엇이나 데이비드가 분에 넘치는 집을 산 것이 문제가 아니고(그들은 늘 부모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고마워하는 마음보다는 굴욕감을 먼저 느꼈다.) 다섯째아이 벤이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것이 더 문제이지 않을까.

벤은 단지 심술과 고집으로 똘똘뭉친 못생긴 작은 아이에 다름 아닐텐데

아이 넷을 거푸 낳고 힘에 부치던 헤리엇에게 산후우울증이 온 것은 아닐까, 오늘 아침엔 그런 생각도 해본다.

 

헤리엇이나 데이비드가 그저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다가 불행해졌다면 비난할 수도 있겠는데 도리스 레싱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과연 그런 것이 제대로 표현되기나 한 것인지.......

읽는내내 찜찜한 마음이었다.

도리스 레싱의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난 턱없이 부족한 아줌마이다.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저
런던 스케치
도리스 레싱 저/서숙 역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저/이태동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