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잘못된 정보

hohoyaa 2010. 7. 16. 19:03

 

 

 

 

며칠 전 블로그내 어느 한 글의 방문자수가 늘었다.

제목을 보면 그렇듯 방문자 수가 늘리 없는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궁금해서 이삼일을 가만히 지켜보니 유입검색어에 '영화배우 강숙희'가 있다.

더구나 다음이 아닌 네이버 검색으로 많은 방문자가 다녀갔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져서 나도 검색을 해보았다.

그러다가 익숙한 사진을 보게 되었다.

 

 

 

네이버의 어느 블로거가 내 블로그의 사진(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진에 해당함)을 가져가 네이버 DB에 올라간 것이다.

글 내용을 보니 삼성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른 사실때문에 좀더 자료를 찾아보았다.

 

시간상,또 능력부족으로 인해 제일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기사는 찾지 못했고

일단 어느 한 기사를 찾았다.

 

 http://www.sisa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25382

 

61년 '황진이'에 출연한 모배우가 기사에 나면서 당시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를 찾았나 본데 오래전 영화라 자료가 부족했던 것 같다.

더하여 그 배우의 성이 박모씨라는 말이 나오자 강숙희의 본명이 박모라는 설까지도 나왔다.

그나마 집안 어른들로부터 얻어들은 것이 있기에 기사를 관심있게 봤는데 소송을 낸 여배우의 나이를 보니

강숙희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

강숙희는 70 중반이신 우리 친정어머니보다도 연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그런 사실확인도 안해보는지.......

다른 것도 아니고 인물에 대한 기사이니만큼 강숙희라는 이름 석자와 함께 영화史쪽으로 조금만 더 알아보면 되었을것을.

강숙희는 61년 '황진이의 일생'에서 황진이로 출연을 했었고 소송을 낸 여배우는 황진이역을 했노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데도 모두들 그녀가 강숙희라고 단정짓는 글들을 계속해서 올리고 있다.

 

지난 번에 같이 올리려다 여의치못해 누락된 정보가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고 올린다.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4207&r_serial=02

 

동아 라디오방송의 자료이다.

63년에 방송된 것이고 당시 강숙희는 원로배우 석금성의 아들인 이택균과 결혼을 해서 살고 있었다.

 

 

석금성(石金星, 1907년 12월 3일 ~ 1995년 9월 3일)은 한국배우이다. 본명은 석정의(石丁義) 또는 석정희(石丁羲)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어릴 때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생이 되었다. 관객으로 극장에 갔다가 극작가 이서구에게 발탁되어 토월회에 입단하면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데뷔작은 1925년에 공연된 《추풍감별곡》이다.

여배우가 희소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곧 토월회의 간판급 배우로 성장하였으나, 데뷔하던 해 연말에 충청남도 서산군의 부호 이충진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3년 여만에 파탄을 맞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복귀 후 영화에도 출연하고 토월해 재기공연에 출연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크게 흥행한 토월회의 연극 《아리랑고개》에서 봉이 역으로 주목받았다. 토월회 해체 후에는 미나도좌 신극부에 합류하고 신흥극장 창립에다 가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파적 경향의 문예운동가이자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과 만나 두 번째로 결혼하게 되었다.

1932년에 토월회의 후신인 태양극장이 창립되자 이 곳에서 활동하면서 신민요나 촌극 음반을 출반하는 가수 활동도 병행했다. 영화에도 간헐적으로 출연했으나, 딸 최로사 등 자녀들을 키우며 육아에 전념하느라 종전과 같이 "조선의 대표적인 여배우"로서의 활동은 줄어들었다. 석금성에게 주어지는 배역도 점차 주연에서 조연으로 변화해갔다.

1948년에 최승일이 사남매를 데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을 때 시부모를 모시느라 따라가지 못했다가 인생의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한국 전쟁 후부터 다시 개성이 강한 조연으로 영화계와 텔레비전 드라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80대까지 연기를 계속하여 한국 연계계의 산 증인로 불렸다.

맏딸 최로사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막내아들 최호섭은 고모 최승희를 따라 무용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석금성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북조선으로 간 자녀들과 다시 만나기를 원했으나, 1995년에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인터넷에서 참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그중 대부분이 그리 믿을만하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일단 급하면 검색창을 열고 내 구미에 맞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번 일을 보니 정말로 인터넷 검색결과에 의구심이 든다.

지금의 글도 혹여 사족이 달릴까 조심스럽게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해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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