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일흔아홉에 돌아가셨다.
장마철에 들어서던 어느 일요일 아침 머리를 북쪽으로 돌려다고 하시더니 거짓말처럼 눈을 딱 감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 온가족이 모여앉은 밥상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던 우리는 빈속으로 먼길 갈 수 없어 새벽녘에 당신이 손수 찬밥을 끓여 한술 뜨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체 새모이만큼 드시는 분이시지만 물에 말은 밥을 드셨다는 말씀에 제대로 진지를 드시라는 엄마의 권유에 그만하면 허기는 면했으니 됐다고 하셨다.
일요일에는 절대 외출을 하지 않는 나였는데 그 날은 아침을 먹고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그 사이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만 빼놓고 온가족이 모인 날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참으로 맑은 정신이셨다. 내게도 일찍 들어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셨댔는데.......
내가 나가고 얼마 후에 식구들을 모두 불러 아무개에게는 이런 신세를 졌으리 기회있을 때 그 신세를 갚을 것이고 아무개한테는 기별을 해서 죽기전 얼굴이나 보았으면.......하셨고 서랍장 어느 칸에는 내가 죽으면 갈아입힐 수의가 있고 이 보따리는 나 죽으면 태워 버려라,저 보따리는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고 자질구레한 것은 내가 미리 처리했다. 서랍장을 치우고 그쪽에 눕게 해다고. 머리를 북쪽으로 돌려라.
할머니는 당신이 죽거들랑 얼굴에 덮으라고 하얀 홑이불까지 따로 마련해 놓고 가셨다.
당시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다. 괜히 길가에 있는 공중전화를 보고 집에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할머니가 방금전에 돌아가셨다는 오빠 말에 택시를 잡아타고 내내 울면서 갔다.
처녀는 염하는 것을 보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할머니가 내게 무슨 안 좋은 일을 하실 분이 아니란 걸 믿었기에 그 자리에 참석했다.할머니는 편안한 얼굴이셨는데 살아 생전에 알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몹시 낯설은 얼굴이었다.아마도 온 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주름살도 펴져서인지 더 젊어 보이셨다.
평소에 할머니는 이 세상엔 영혼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있다고 믿으니 만약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내 발바닥을 살살 간지럽혀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게 초보 영혼에게 힘들면 아무거라도 좋으니 내가 알아들을만한 어떤 신호를 보내 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루는 동안 나는 할머니의 시신을 모신 방에서 내내 할머니와 함께였다.
아니 할머니가 혹시나 내 발바닥을 간지럽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온 신경을 발바닥에 집중시키며 어떤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할머니는 미신같은 것을 믿지 않는 분이셨다.아마도 그래서 영혼으로 내 곁에 계셨어도 손녀딸이 미혹당할까 염려스러워 일부러 냉정하게 신호를 보내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나는 신장이 안좋아서 늘 한약을 지어 먹던 기억이 있다.
부은 얼굴을 정상얼굴로 알고 살았던 적도 있었다.
늘 그게 염려스러웠던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내 병을 모두 가져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얼굴이 붓지 않게 되고 신장염이 스리슬쩍 없어져 버렸다.
돌아가시고 1~2년 후 사촌고모가 용한 무당을 알아서 찾아갔더니 우리 할머니 이야길 하더란다.
세상 하고많은 귀신 중 이런 귀신은 첨보겠다.
육신은 죽었어도 살았을적보다도 더 손주들 걱정이다.
다들 죽어서 귀신이 되면 살아생전 원통함이 뼈에 사무쳐 남은 사람들에게 해꼬지도 하고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바라는게 많은데 이 할머니는 그저 자식손주들 잘되기만 저승에서도 빌고 또 빌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이 없다.
할아버지는 여든아홉에 돌아가셨다.
일주일 이상을 혼수상태에 계시다가 마지막이 다가올 즈음에는 갑자기 눈을 뜨시고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누구를 잡으려는 듯 허공을 쥐락펴락하셨다.
친척어른들 말씀이 조상신들이 오신거라고 하더니 그렇게 그 날 할아버지는 저승가는 배를 타셨는가 보다.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손자들보다 더 귀히 여기셨던 손녀에게는 몇가지 유품을 남겨 주셨다.
어려서부터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나중에 무언가 물려주게 되면 그건 숙영이한테 물려줄거다. 가만 보니 얘 하나만 무엇이든 오래도록 소중하게 잘 간직할 것 같아.
그렇게 물려받은 유품 중에는 내가 사다드린 혈압계며,회중시계,또 버린다고 내 놓았던 나의 물건들도 들어있었다. 할아버지는 말년에 치매기운이 좀 있으셨댔다.
다행히 그로 인한 큰 사고는 없으셨고 돈만 생기면 동네 안가본 약국없이 다 돌아다니시며 드시지도 않는 약을 사 모으느라 휑하니 사라지곤 하셔서 식구들 혼을 빼놓긴 하셨다.
몸이 안좋다 싶으시면 설사변을 받은 통을 엄마에게 내밀며 상태를 좀 봐달라고 하셨다.
간호사출신인 엄마에게 무척 의지하셨던 듯 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내가 출근하고 난 뒤에는 총채와 비를 들고 내 방에 들어오셔서 '소지'를 해 주셨다.
원체 오래 전부터 해오셨던 일이라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내 개인 청지기라고 놀리셨고 할머니는 작은아씨를 모시는 찬모라고 자칭하시며 늘 기꺼이 2대 독녀 손녀를 챙겨 주셨었다.
평소 할아버지의 소원은 88올림픽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 해 88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88올림픽을 컬러 tv로 보시며 올림픽 개막식도 못보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애닲아하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tv를 벗삼아 늘 켜두고 계셨다.
늦은 밤, 퇴근 인사를 드리려 할아버지가 계신 방문을 열어보면 영낙없이 할아버지는 주무시고 tv혼자 열심히 전파를 타고 있다. 살금살금 들어가 소리나지 않게 살짝 스위치를 끄면 그 소리에 깨시는지 tv의 빛이 꺼지는 바람에 깨시는지 어~! 보고 있다. 하시며 부스스 일어나 앉으셨다.
그러곤 늦게 퇴근한 손녀딸이 궁금할까 봐 과자봉지라도 하나 건네 주시려고 비밀창고를 뒤적거리시곤 했다.
이번 봄에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셨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많이 닮으셨는데 올해 일흔아홉이시다.
아버지도 할아버지같이 tv와 친하시니 운동부족이다 싶어 모처럼 따뜻한 봄 날 신선한 흙냄새나 맡을까하여
심심풀이로 선산 아랫켠 땅에에 채마밭이나 가꾸신다며 당숙들과 주말마다 산에 가시더니 무리를 하셨는지 혈압이 50아래로 떨어져 혈압기에도 안잡히고 눈도 뜨지 못하실 정도로 기력이 떨어지셨다.
당숙어른들 말씀으로는 아버지는 아무것도 안하시고 여기저기 참견하시고 점심드신게 다라시는데 평생 손에 굳은 살 만드는 노동은 안해보신터라 그도 힘에 부쳤는가보다라며 지금은 웃어 넘길 수가 있다.
아버지의 상태가 위중하다고 생각되어지는데도 엄마는 내게 연락을 안하셨다.
아들들한테도 알리지 않으시고 엄마 혼자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과 집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을 하셨다.
마침 아버지 생신이 끼어 아들들이 모이니 그 앞에서 눈물이 나오더란다.
다행히 지금은 기력을 많이 회복한 상태라 한시름 놓았는데 엄마는 내 카메라로 찍은 상혁이 동영상을 보시며
저게 네 카메라로 찍은 거니? 사진이 잘 찍히니? 크게 뽑아도 잘 나오니?
작년에 성당에서 영정사진을 찍었는데 영 마음에 안든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더 늙기 전에 영정사진을 찍고 싶은데 네가 찍어줄 수 있겠니?
할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편찮으실 때 찍은 사진밖에 없어 그 야윈 얼굴을 볼 때마다 안좋더구나.
엄만 무슨 영정사진을. 하다가 내 생각이 짧았음에 얼른 입을 닫았다.
이왕이면 편안하고 좋으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싶으신게다.
말년에 힘들고 초췌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 않으신게다.
아버지가 웬만큼 회복이 되시면 가서 영정사진을 찍어 드리겠다고 했다.
눈물이 난다.
잡숫는 양도 줄었고 다른 욕심도 안생기고 살림도 늘리지 않고 있는 사진이나 물건도 조금씩 정리를 하고 새옷도 싫다하시는 품이 그 옛날 할머니가 다 초개같다하시던 바로 그런 의미같아서 딸은 눈물짓는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추억하듯이 울 엄마 아버지를 추억하게 될 것이 그저 슬퍼서 자꾸만 눈물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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