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J에게

hohoyaa 2008. 8. 29. 23:40

얼마 전 "고래 여인의 속삭임"이란 책을 읽었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어릴 적 친구로 인해 주인공의 삶이 소용돌이 속으로 요동치기 시작하는 그런 내용이었지.

물론 소설이다 보니까 지나간 그 시절이 반드시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었고 애써 잊으려고 외면하였던 안 좋은 추억이 있었고 비극으로 끝나긴 하지.

 

네게서 메일을 받은 후 난 그 소설 속 주인공과는 반대 방향으로 지난 시간을 곱씹어 봤다.

너를 떠 올리면 경우가 생각나고 영숙이가 생각나고.

영숙이는 벌써 수십 년전 명동에서 만났었지.

곧 있으면 모병원 마취과에 있는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했었고 동생들도 모두 잘 있는 듯 하더라.

같이 네 이야기도 했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게 마지막이었지.

아마 지금도 똑순이처럼 야무지게 잘 살고 있을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경우는 아마도 지금 쯤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을까 겁나는 추측을 하고 있어.

결혼 전 급성 뇌수막염에 걸렸었는데 감기인 줄 알고 치료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광화문에 있는 고려 병원(지금의 삼성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문병을 갔더니 나를 쳐다 보는 눈에 촛점이 없고 먼 곳만 보고 있어서 나도 어디에 시선을 맞춰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어.

그 때 모두들 가망이 없다고, 낫더라도 사람 구실을 못 할 거라고 해서 걱정을 했었는데 워낙 본인의 의지가 강해서인지 다행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가진 것은 없어도 성실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고 원주에 터를 잡고 열심히 살았어.

그런데 그 여파인지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파서 원주에 있는 큰병원에 갔더니 머리를 흔들면서 서울 큰병원으로 가 보랬다고 연대 세브란스에 입원을 하러 왔더라구.

난 아이들도 어리고 회사가 양재동에 있을 때라 이런저런 핑계삼아 병원에 한 번 밖에 못 가봤는데 며칠 후에 퇴원해서 원주로 간다고 전화가 왔고 .

회사 후배의 와이프가 그 병원 간호사였기에  뒤에서 여러 편의를 봐주고 경과를 알려 줬었는데 아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퇴원을 했을 거라고 몇 달후에야 어렵게 얘길 해 주더라.

그 땐 이미 경우와 연락이 닿질 않는 상태여서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다.

농담처럼 자기 죽은 후에라도 아이들에게 옳은 길로 가도록 말 한마디 해 줄 사람이 있어서 안심하고 갈 수 있을거라고 내게 얘기했었는데, 난 지금 속수무책으로 있어.

남편 이름을 알고 있기에 114에도 물어 봤었고,딸 이름을 알기에 싸이월드에서 친구찾기도 해 봤는데 찾을 수 가 없었어.

학교 다닐 때 경우를 너무 싫어한게 마음에 걸려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늦게나마 친구로 받아 들인다고 해서 만났던 내 오만함이 참 부끄럽게 느껴져서 많이 괴로웠다.

 

그래도 젤 순탄하게 잘 살고있을 네 생각을 하면 덩달아 내마음도 여유로와지고 부담이 없어 좋았다.

너를 생각하면 우리가 함께 했던 3년 보다도 딱 세 장면의 네 모습이 뇌리에 진하게 박혀 있다.

고 2때 경주로 수학여행 갔을 때 남의 밥을 못 먹어서 내리 굶고 있었던 내게 다른 반이었던 너는 도시락 반찬으로 나온 삶은 계란을 들고 우리 반으로 찾아왔었지.

계란은 아무 양념도 안 했으니 모두 맛이 똑같을거라면서.

사실 지금도 그리 식성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 때 참 별났던 내 입맛을 넌 유별나다 흉보지 않고 잘 참아 주었어.

그런 마음으로 지금의 너희 아이들을 대하겠지? 난 편향적인 내 입맛 만큼이나 애들을 달달 볶고 있단다. ^^;;

또 한 번은 대학 합격자 발푯날 아침 일찍 네가 우리 집에 찾아 왔었잖아.

연희동에서 장안동까지 거리도 가깝지 않고 이미 넌 다른 학교에 합격을 한 상태에서 내가 발표장에 혼자 갈까 봐서 ,혹시 안 갈까 봐서 같이 가주려고 찾아 왔다고 했었지.

나,사실 네 덕에 용기내어 갈 수 있었다.

그 때 경쟁률이 16.5 :1 이던가?  14.5:1 이던가?

어떻게 쉽게 간다고 고른 것이 엄청난 경쟁률로 인해 거의 자포자기했었지.

그리고 붙었으니 망정이지 떨어져서는 도저히 혼자 집으로 돌아 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이 불안했었거든.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어느 봄 날.

화사한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서 우리 학교 정문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

내 친구들과 막 학교를 나서려고 했는데 갑자기 쨘하고 나타난 네 모습이 참 여성스럽고 이뻤었다.

미리 연락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너는 마치 찬란한 태양처럼 나를 밝게 비추어 주었었지.

너도 알다시피 나의 학창시절은 참 막막하고 암흑같았잖아.

아마도 네가 없었다면 나의 그 시절은 더욱 암담했었을거야.

부잣집 막내 딸 답지않은 속깊음으로 나를 놀라게 했던 ,때로는 아주 장난기 많고 개구진 네 모습이 생각난다.

너, 당시 레이프 개럿이라는 유명 가수가 방한했을 때 안방에서 떼굴떼굴 구르며 엄마한테 떼를 써서 공연에 갔다는 애길 듣고 너무 우습기도 하고 역시 막내로구나 생각했었거든. 그리고 가수 최병걸이 '실버벨'을 부를 때 이렇게 부른다고 혀를 내밀며 흉내냈던 것 기억나니? 더불어 김세레나 흉내도 냈었잖아. *^^*

지금의 너희 식구들은 알고 있는겨, 너의 그 모습들?

2층의 네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지.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이상하게도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너는?

 

사실 여기 블로그에도 난 수박 겉핥기식의 글만 쓰고 있는지도 몰라.

네게 여기 내 집을 알려주고 네가 기억하고 있던 나와는 별개의 내 모습을 보게 될까 봐 약간의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부분에서 내가 깨어졌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

어쩌면 깨진게 아니라 평화를 가장한 일상의 권태로움에 적당히 적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친구야,다시 만나 반갑다.

연대 뒷 산, 비밀의 정원은 여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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