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아버지와 친정 선산에...

hohoyaa 2008. 9. 23. 22:19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 한 켠이 싸아하게 아려온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아버지에게서보다 할머니에게 더 많이 들었다.

할머니는 아버지 사주에 외로울 孤가 들어서 평생을 스스로 외롭게 지낼거라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우연인지 원래 내게도 고모들과 삼촌이 있었는데 모두 어릴 적에 죽고 아버지만 혼자 남았다.

다른 자식들은 할머니의 젖을 먹여 키웠는데- 할머니 말씀은 할머니의 젖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훗 날 아버지는 이미 그 때 할머니한테 결핵 기운이 있으셨기에 아마 그런 연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유모를 대서 키웠기에 살 수 있었고 또 그래서 할머니와는 끈끈한 정이 없다고 늘 말씀하셨었다.

대신 할머니는 종로의 청운 중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수혈을 잘 못 받아 죽은, 살가웠던 삼촌을 늘 애석해하고 그 나이를 세곤 하셨다.

 

잔나비띠인 아버지는 올해77세.

예전에 내게 아버지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셨던  그 때의 할머니 연세쯤 된 것 같다.

별로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가 애들 데리고 밤을 주우러 가자고 몇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아 월요일에 남편과 셋이 선산엘 갔다.

선산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가끔씩 둘러보시는데 봄이면 두릅이 여기저기서 많이도 올라 오건만 산주인은 맛도 못보고 남의 손을 탄다고, 밤도 마찬가지로 며칠 전에 왔더니 벌써 사람들이 산엘 들어와서 다 털어갔다고 우리 차례가 될려는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늘 가는 산이 아닌 건너편 산으로 가면 제법 알이 굵은 것들이 많이 있을거라고 하셨으나 거기도 밤껍질이 더 많이 보인다.

그나마 발에 채이는 산밤이 반짝반짝 이쁘게 생겨서 주워 담는다.

 

 

 

 건너편 산에서는 수확이 신통찮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산으로 건너 왔다.

몇년 전 저렇게 몇군데에 문을 해 달았어도 들어갈 구멍이 있어서 아는 사람들은 수시로 드나드는 눈치다.

맑은 날 우산은 왜 들고 오셨어요?했더니 밤도 뒤집고 모으고 하려면 필요하다 하신다.

나는 욕심만 앞서서 장바구니에 종이 박스까지 챙겼으나 장갑도 준비 못했는데 치밀한 아버지는 목장갑에 우산,밤 담을 비닐 봉지와 집게까지 준비하셔서는 손에 흙하나 안 묻히고 밤을 털어 가셨다.

 

 

 

 이 길은 참 익숙한 길이다.

생각도 안나는 어릴 적부터 시집오기 전까지 해마다 할아버지 손잡고,아버지 손잡고, 친척 아저씨 등에 업혀서,오빠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동생과 장난치며 오르던 산소 가는 길이다.

난 여자였어도 해마다 산소엘 다니는게 즐거웠다.

집에서 해도 뜨기 전에 길을 나서서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명절대목을 보려고 벌여 놓은 좌판들이며 낚싯꾼들을 위해 지렁이나 구더기같은 벌레들을 붉은색 고무 다라이에 담아 놓고 파는 상인들이 분주했다.

나는 그 고물거리는 벌레들 모습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호기심에 흘깃흘깃 돌아 보며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버스를 무작정 기다리곤 했다. 

배차 간격도 지켜지지않는 버스를 간신히 타고 보면 여기저기서 꼬꼬댁하고 닭우는 소리가 들리고 모두들 커다란 짐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발이 밟히고 땀냄새가 비릿해도 뒤뚱뒤뚱 털털거리며 가는 버스안은 명절을 맞은 사람들의 웃음 소리만 가득했다.

그 와중에 망우리정도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나면 무슨 번호표를 나눠주고 경품권 추첨을 했는데 해마다 나는 화장품을 싼 값에 받을 수 있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난데없이 굴러 떨어진 호박에 좋아하는 것도 잠깐, 그런 날보고 오빠는 내가 어리숙하게 보여서 그 번호 부르는 사람이 나를 찍어서 일부러 그 번호를 주는 것이라고 찬물을 끼얹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돈이 없는 어린앤데 왜 하필 나를 찍겠느냐고 내가 운이 좋은 것이라고 퉁기면 오빠는 네가 여자니까,딸이니까 할아버지나 아버지,그리고 혹 아저씨들이 돈을 낼지도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상술을 쓴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괜히 자기가 안 되니까 심술이야 싶다가도 내가 그렇게 어리석게 보이나 싶어 당첨 되고도 안 된척 시치미도 떼어봤는데... 용케 그 아저씨는 나와 눈을 맞추며 "ㅇㅇ번 되신 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었으나 저 나무들은 어릴 적에 본 것보다 더 크고 울창해 보인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올라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눈물이 난다.

앞으로 몇 년을 사실런지 몰라도 먼 옛날 할머니가 가셨듯이, 할아버지가 가셨듯이 아버지도 이 길을 자손들의 손을 빌어 마지막으로 오를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의 끝 날,여기 이 곳에 못 올 것이다.

어릴 적에는 나도 이 곳에 가족들과 친척들과 같이 묻히고 싶다고 시집을 안가겠다고도 했었는데 할머니는 시집 안 간 처녀는 선산에 못 들어오게 할거라고 으름장도 놓으셨었다.

나는 죽어서도 이 곳이 그리워 맴을 돌겠지.

 

 

 

건너편 산에서는 헛탕이었는데 내가 올 줄을 알고 계셨는지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안에 오니 밤톨이 한마당이다.

마치 할머니가 일부러 흘리신 듯 산소 옆으로 난 길에 조르르 떨어져 입을 벌리고 있는 밤들.

 

 

 

 밤을 줍다가 할아버지,할머니가 늘 해를 보고 별을 보고 날을 세고 계실 경치를 새겨 본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할머니가 계신 곳이 요기이고 세째 할아버지,할머니는 조기 계시겠구나.

동생은 군대에 가 있어서 할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마침 비상 훈련이 있어서 장례식에는 참석을 못하고 뒤늦게 휴가를 나온다더니 해거름이 되어도 연락이 없어서 모두들 걱정이었는데 한 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동생은 부대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이 곳 산소로 왔다고 한다.

홀로 계실 할머니 생각에 같이 있어 드리려고 채마르지도 않은 붉은 봉분옆에 누우니 잠이 절로 오더란다.

그렇게 한나절을 여기에서 자다가 저녁어스름에 산을 내려왔다고 한다.

아버지를 닮아 말이 없는 동생은 그렇게 할머니와 이별을 했다.

 

 

 

아버지가 해마다 봄이면 따다 먹으라고 성화하시던 두릅나무.

여기저기 정신없이 솟아나오는 자연산 두릅,난 처음 봤다.

여기는 윗대 할머니가 계신 곳, 잘 기억해 뒀다가 내년 봄에 와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의 무심한 표정.

할머니 말씀이 6.25 전쟁에 학도병으로 나갔던 아버지는 휴전이 되고 학교가 다시 열렸는데도 소식이 없어 중간에 사람을 넣어 돈을 줘가며 서둘러 아버지를 수소문해서 데려오게 했다는데 아마 전쟁통이라 중간에 있던 그 사람도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 남은 장남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건만 정작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개나리 가지를 꺾어 입에 물고 마치 한 시간전에 마실나갔다 들어 오듯이 그렇게 대문을 들어 서더란다.

멀리 전라도에서 걸어 걸어 올라온 아버지는 눈물도 안 보이고 부둥켜 안지도 않고 그저 씨~익 한 번 웃을 뿐이었단다.

아버지는 살아 오시면서 늘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무덤덤한 아버지는 감정 표현은 없으셔도 외출할 때에는 내 손을 잘 잡아 주셨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산밤이다.

알은 작지만 맛은 달고 껍질은 연해서 잘 까진다.

밤을 물에 30분 정도 담가 놓으니 밤벌레가 밖으로 나와 죽는다.

30분 후에 건져서 밀폐용기에 넣고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으면 오랫동안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엄마가 알려 주셨다.

우린 아마 군밤으로 거의 먹어 치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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