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아는만큼 보이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hohoyaa 2012. 7. 10. 01:17

요즘 2주에 한 번,월요일마다 친구와 영화를 보고있다.

여고시절부터의 친구지만 같이 영화 한 편 본 기억이 없으니 우리는 무슨 추억을 공유했는가 싶다.

이번 주에는 우디 알렌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자고 해서 예매를 했는데 장염에 걸려 못나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고3 딸아이의 기말고사 기간이라 학부모시험감독관으로 학교에 갔었고 예매한 티켓을 썩히자니 아깝고 내심 눈치를 보며 딸아이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그날 시험을 생각처럼 잘보지 못했고 아직 시험이 끝난 것도 아니지만 그런 기분으로 집에 가봤자 뭐하겠나, 차라리 몇시간만 엄마와 영화를 보면서 기분전환을 하자는 꼬드김에 결국 딸아이도 넘어왔다.

얼마 전에도 우디 알렌이 누구인지 알려주면서 미아 패로우,앙드레 프레빈,순이 프레빈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딸아이는 모르고 있을 일련의 가쉽기사 내용을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때 그 시절의 센세이셔널한 이야기에 딸아이는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앙드레 프레빈이 누구? 미아 패로우는? 그나마 미아 패로우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쓴 쓴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역을 맡았던 배우라하니 조금 고개를 끄덕거린다.

현재를 살아가는 딸아이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기억보다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불안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그런 요즘의 10대이니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지루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만큼 딸아이와 공감하던 영화가 또 있었나싶을 만큼 좋은 시간을 보냈다.

 

 

제목보다도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 개봉 전부터 눈여겨 보았던 '미드나잇 인 파리'.

헐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작가인 '길'은 아름다운 약혼녀 '이네즈'의 부모를 따라 온 우연한 여행길에서 파리에 반하게 되고 결혼 후 파리에 정착해서 자기만의 작품을 쓰겠다는 꿈을 꾸지만 파리의 낭만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약혼녀덕분에 '길'은 홀로 산책하는 시간을 갖게되고 우연히 마법의 시간여행에 동참하게 되어 늘 자신이 동경해마지않던 하던 문화의 황금시대 1920년대의 파리로 가게 된다.

 

 

이미 포스터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녹아있고 그러한 이유로 이 포스터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영화에서는 고흐의 친구 고갱만 잠깐 나오는데 그시기는 고흐가 이미 세상을 떠나서이기도 하겠지만

드가,달리,고갱,모딜리아니,로트렉,터너등 화가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거나 등장한 경우에는 그들의 작품이 나오지 않고 반면에 작품이 배경으로 깔리는 고흐나 모네같은 경우에는 영화속에서 그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작품과 작가 모두 등장하는 예로는 피카소가 유일한데 이는 그의 작품속 연인 '아드리아나'에게 '길'이 매혹당했고 이후의 시간여행을 함께 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길'과 약혼녀 '이네즈'가 데이트를 하던 모네의 일본식 다리가 있는 지베르니에 수련연못.

곳곳에 숨어있는 이런 장치가 미술이나 문학,음악에 아주 적은 소양만 있어도 영화를 영화이상으로 즐기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아는만큼만 보이지만 보았던 것을 알고싶어하는 욕구도 생기는 영화이다.

 

그러면 영화는 왜 하필 1920년대를 배경으로 삼았을까?

단순히 문학의 황금기여서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너무 단순하다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곱씹어 생각해보면 모든 인물들에게서 그 답이 보인다.

영화에서 길이 처음 만나는 유명인사는 젤다와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이다.

젤다는 부유한 대법관의 딸로 스콧이 성공하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파혼을 선언했었고 이에 스콧은 작가로서 첫번째 성공을 거둔 일주일 후 젤다와 결혼한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어 벌어들인 돈을 그 해가 가기 전에 흥청망청 다 써버린 젊은 그들은 이후로도 계속 그런 생활을 되풀이하게 되고 결국엔 끝이 좋지 않았다.

영화속 주인공 '길'역시 헐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이고 약혼녀 '이네스'는 지적 허영과 속물적인 근성을 지닌 여자로 젤다와 스콧 부부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보인다.거기에 더하여 스콧이 파리생활을 하기 전 미국에서 '벤자민 버튼의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같이 판타지적인 소설을 집필했던 것을 생각하면 영화 초반에 만난 이들 부부가 예사스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파리의 문화에 취하고 낭만의 비를 맞고싶어하던 - 21세기를 살고있는 '길'은 마법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 그가 동경하던 문화의 황금시대 1920년대의 파리로 간다. 세상에나~!! 지나간 시대의 우상 피츠제럴드를 만나 악수를 하고 헤밍웨이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스테인에게서는 자신이 써왔던 작품에 대한 평을 듣는다. 또 피카소같은 거장의 작품을 눈앞에서 감상하고 그 작품 속 숨은 주인공 '아드리아나'를 보고는 매혹을 느낀다. 후세 사람들에 입에 싸구려 창녀로 오르내렸던 그녀는 사실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21세기의 '이네스'보다도 예술를 잘 이해하는 20세기 여성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속한 시간인 1920년대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방가르드를 외치던 벨 에포크시대(1890년대)를 동경한다. '아드리아나'역시 '길'과 함께 의도치 않은 시간여행을 하게 되고 벨 에포크시대의 막심에서 로트렉,드가,앙리 마티스,고갱등과 만나지만 그들역시 자신들의 시대보다는 르네상스가 황금시대라고 외친다. '길'은 벨 에포크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등과 어울리게 되고 여기에서 처음으로 '길'은 자신이 21세기에서 왔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달리나 그의 동료들은 그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데 이로 인해 달리의 작품 늘어진 시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로이드에게서 영향을 받은 달리는 꿈을 그리고자 했으며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운동에도 참여했다.

늘어진 시계가 있는 '기억의 지속'은 1931년 작품으로 영화속 20년대보다는 후기이며 개인적인 상상을 확장해 보면 '길'이 시간여행을 하고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서야 같은 공간에서의 다른 시간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순진무구한 억측도 해본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당시 달리와 함께 어울리던 영화감독 '루이스 브뉴엘'에게 영화를 위한 모티브를 던져 주는 장면도 있다. "안달루시아의 개"나 "황금시대"를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두사람이 합작한 영화속에 아마도 '길'이 이야기한 그런 주제가 녹아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역시 가장 큰 재미는 바로 이것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rspeare & Company)"이다.

영화 예고편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그 장면-단 한 컷을 보는 순간 우리모녀는  어두운 극장안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은 몇 해 전 읽고서 독후감을 쓰려다 미루고 거의 잊혀진 책이었는데 오늘 영화를 보고 집에 오자마자 찾아보았다.

이 책의 소재가 된 파리의 고서점은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영화 후반에 '길'이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스쳐지나가는 장면에 나온다. '길'이 문학의 도시였던 1920년대의 파리를 사랑한 작가인만큼 저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들어가는 장면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했지만 '길'은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에단 호크'와 '쥴리 델피' 주연의 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에서 두 주인공이 운명적으로 재회하는 공간이기도 한 오래된 고서점은 겉으로 보이듯 책만 가득한 서점만은 아니었다.

1919년에 헤밍웨이가 파리생활을 하면서 가장 사랑했던 곳이었고 파리에서 영문판 책을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기에 아마도 이 곳 어느 구석에 가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문인들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싶다.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서점의 창시자 '실비아 비치'의 정신을 이어받아 공산주의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조지 휘트먼'이 완성한 영문책 전문 헌책방으로 전 세계 작가들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문학의 박물관이며 휴머니즘의 성지이다. 그는 소설가를 지망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못하자 헌 책을 팔거나 빌려주는 일과 또 문사들과 어울리며 이들을 뒷받침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휘트먼은 1951년 세느강변에 영문책만을 취급하는 헌책방을 차려 수많은 문인들의 안식처로 만들었는데 이곳에서는 누구나 서점 한구석에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무료로 숙식을 해결하고 꿈을 꿀 수 있다고 한다. “위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낮선 이들을 불친절하게 대하지 말라” 는 예츠의 싯구를 책방 한가운데에 큼지막하게 붙여놓고 하루를 머물면 2시간씩 서점 일을 거들게 했고 그에 곁들여 책을 한권씩 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방세를 대신해 서점일을 돕고, 끝을 알 수 없는 책읽기와 무모한 글쓰기를 강행하며,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짜릿한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에즈라 파운드,제임스 조이스,헤밍웨이등도 역시 이 서점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어쩌면 유명인들의 면면만 내세운 심심한 로맨스 영화일 수도 있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본다면 장면 하나에서 무수히 많은 말을 우리에게 건네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짧은 시간,한정된 스크린에 다 담아내지 못한 채 영화속에 녹아있는 '장치'를 찾는 즐거움이 있었고 내가 찾아낸 기억의 편린은 이정도이지만 아마도 더 박식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욱 놀라운 비밀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여고생 하나는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시간낭비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물어보기도 전에

음악에 취하고 영화에 취한 하나는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알게 되고 활자로만 만나던 시대적인 배경을 영상으로 보게되니 지금의 자신이 알고있는 지식이란게 결코 자랑할만한 수준이 아니며 상업적인 여타의 영화들보다 감성적으로 충족을 시켜주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한다.

수능이 끝나면  제일 먼저 영화속에 등장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싶다고 이런 것이 진정한 영화이고 산교육 어쩌구하며 시험이 끝나면 작가를 희망하는 친구와 다시 한번 보고싶다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더니 시험 마지막 날인 오늘, 친구와 보기로 약속한 헐리우드 대표 상업영화 '스파이더맨' 역시 놓칠 수 없다며 발걸음 가볍게 학교에 갔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저/조동섭 역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역/스콧 피츠제럴드 저
노인과 바다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저/김욱동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