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2010년 추석.

hohoyaa 2010. 9. 22. 22:49

이번 추석은 연휴가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친정에 가서 시댁에 온 올케들 비위 맞추기도 싫으니 그냥 집에서 우리끼리 지냈다.

외가에 갔으면 맛있는 것 많이 먹을텐데.......

그저 송편이나 빚고 전이나 좀 부치며 명절기분을 내기로.

 

 

오랜만에 만들어보는 떡.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는 송편을 안 빚었었다.

 

대대로 선산을 지키던 묘지기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늘 푸근하게 먹고, 싸안고 돌아왔기에 친정의 추석은 명절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멀었고 또 식구들이 떡을 좋아하지 않아 굳이 집에서 송편을 빚지는 않았다.

한참 전 그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후손들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선산 묘직이라는 것이 싫은지,

할머니의 며느리가 들어오면서부터는 그 외양간 옆에 있던 곡간의 문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서울 살던 우리가 그나마 추석 날이나 되어야 재미삼아 까보던 밤도 구경할 수 없게되었다.

그린벨트에 묶여 손을 댈 수 없었던 초가집대신 바로 앞에 신식 양옥집을 지어주었는데도 그 며느리는 늘 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묘지기 집안이라지만 달가워하지 않는 곳에는 가고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 점차로 여자들은 따로 음식을 마련해서 산소에 가고 아저씨가 아무리 권해도 그 양옥집에는 들어가게 되지 랂았다. 젊어서 열심히 산을 돌보던 아저씬 그 일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아들들은 선대만큼 일을 열심히 하지 않기도 했거니와 고향을 떠나 다른 사업을 해보겠다고 우리 집안 몰래 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사실과 함께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다.

당숙들은 아무리 땅을 주고 소작을 부치지만 묘직이라는 직업이 현대 정서에 맞지않는다 하여 그간의 일은 모두 책임을 묻지않고 그만 놓아주기로 했다. 그 후로는 어른들이 꾸준히 산을 돌보면서 아버지가 선산이 있는 이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가끔씩 선산 일을 보러 다니신다.

 

친정에 갈 때면 어릴 적 다니던 선산 근처를 지나간다.

아직도 그 양옥집 앞에는 내가 어릴 적 문턱을 넘던 초가집이 그대로 있을 것 같다.

서울내기인 내게 고향이란 뒷마당의 토끼며,소,닭등을 구경시켜 주시던 그 묘지기 할머니의 주름진 웃음이다.

속깊은 부엌에서 젖은 손을 행주치마에 닦으며 나오시던 할머니는 방방이 커다란 상을 내시면서도 우리 아이들까지도 소홀히 하지않고 늘 챙겨주셨었다.

산소마다 새 음식을 올려야하니 차례상차림을 지게에 올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부지런히 다니시던 아저씨의 건강한 다리는 동네에 들어선 아파트의 경비일로 운동량이 줄었을 것이다.

할머니를 닮아 웃음이많았던 묘지기 아저씨의 얼굴도 '추석'하면 떠오르는 고향의 모습이다. 

 

 

 하나가 만들고 상혁이는 눈치껏 포기한 송편 빚기.

요즘 아이들은 추석하면 무슨 추억이 떠오르려나?

 

 

오랭이 조랭이 각양각색의 송편.

속에는 깨와 콩가루,대추를 넣었다.

 

 

상혁이는 남자라서인지 어려서인지 만화삼매경.

아빠는 카메라 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나름 도와주고 있는 중이다.^^; 

 

 

찌고보니 색깔이 안이쁘다.

이번 추석에 만든 음식은 양도 그리 많지 않지만 식구들틈에서 끼니 찾아가며 만들려니 신경이 쓰이고 힘들었다. 이런 일을 해마다 명절이면,일 년에 13번 있는 제사때마다 해내시는 큰 형님이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