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선배 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야하게 생겼다.
그러나 천박하게 야한 것이 아니고 남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마력같은 야함이라고 할까.
누구는 그녀가 당시 유행하던 일본 잡지 '논노'에서 막 뛰어나온 요정같다고도 했다.
내눈에도 꼭 서구화된 일본여자같이 보이던 그녀는 군중속에서 말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고만 있어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던 것.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순진한 면이 있어 남자를 사귀는데 있어서도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많은 스캔들이 있었다.
여자로서 테스보다 더한 인생역정을 겪었던 그녀가 어는 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결혼을 했다.
결혼은 사귀던 사람이 아닌 맞선을 본 남자와 했는데 맞선 본 첫 날 호텔엘 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처음 한 말이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몸이 좀 가렵다란 말이었단다. 그리고 둘은 결혼을 했고 잘 살고 있다.
근 20여년 전에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의 천성은 테스에 가까웠던 것 같다.
다만 그 선배 언니의 환경이 너무도 유복했다는 것만 다를 뿐.
나는 그 선배언니를 지켜보면서 그 당당함이 부모님의 한량없는 이해에서 나오는 것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보다는 여자로서의 자존감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처녀성을 가지고 쑥덕거리는 사람들은 남자가 아닌 여자들이었고 그 언니에 관한 뒷담화는 늘 가장 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솔솔 새어나오곤 했는데 그런 얘기가 돌고 돌아 귀에 들어와도 그저 담담하게 솔직하게 다 시인을 하고 지나간 일들을 옛날 이야기하듯 해주는 그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어쩔 줄을 몰라했었다.
그녀는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이전의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그리고 '제인 에어'의 제인과 달리 테스는 내 마음을 움켜잡았다.
여성 작가들의 환타지를 이야기속에 녹여낸 두 여주인공은 얼마나 행복한가!
앞의 두작품이 섬세한 여성 작가에 의해 행복한 여성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테스는 그녀들보다 훨씬 무지막지한 운명에 무방비상태로 조롱을 당한 순박한 처녀의 모습이다.
책을 지지부진 읽다가 하권의 중간부터는 오늘 오후, 앉은 자리에서 내리 읽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울컥하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테스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운명의 두 여성이 에인절에게 쓴 편지를 읽는데 갑자기 울컥한 것이다.
그러더니 굳어버린 줄 알았던 나의 어떤 부분을 자극한 것인지 자꾸 눈물이 났다.
마침 일찍 귀가한 남편은 혼자 울고 있는 마누라를 보더니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웃음 반,울음 반. 읽고있던 책을 들어 보이며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더니 '허, 참,,뭐가 그리 슬퍼서......' 한다.
나도 모르겠더라.
한창 예민한 시절인 사춘기 시절에 읽으면서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았는데 세파에 찌들고 심장은 화석이 되어버리고 만 지금 테스가 내 안에서 뜨거운 눈물을 퍼올리고 있는 것을 보며 이게 과연 고전의 힘인지 아니면 세상을 살아본 여자로서 테스를 십분 이해하고 동정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분간이 안갔다.
사실 엘리자베스나 제인 에어는 자신은 물론 다른 식구들을 책임지기 위해 극한의 육체노동을 한다거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저당잡히진 않았다.
단지 눈에 띄는 용모를 지닌채 태어났고 그 잇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들지 않은 고결한 정신때문에 테스는 더버빌가의 전설로 내려오는 불행의 수레바퀴 소리를 듣게 된다.
부모를 잘 만났더라면 그렇지 않았을텐데...
학교와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것도 딱한데 올망졸망한 동생들의 미래와 철따라 갈아주는 지붕의 이엉까지도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어야하니 타고난 성실함과 강인한 정신이 없었다면 테스의 인생이 그토록 비참하진 않았으리라.
그런 테스가 선량한 자존심으로 위태로운 삶의 낭떠러지를 비틀거리며 가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테스는 왜 불행하게 살았을까?
작가인 토마스 하디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녀를 철저히 벌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처럼 마음약한 여자라면 테스의 편에서 사물을 보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놓게끔 했겠지만
남자인 작가는 오히려 더 철저하게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지만 테스가 너무 가여워서 눈물또한 솟구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요즘 사추기인지 하늘만 봐도 자꾸 눈물이 난다...ㅠㅠ
BBC판 드라마 "테스"
1부 http://www.mgoon.com/view.htm?id=2052384
2부 http://www.mgoon.com/view.htm?id=2052409
3부 http://www.mgoon.com/view.htm?id=2052433
4부 http://www.mgoon.com/view.htm?id=2052441
테스. 1
테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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