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새해 첫 날,오래된 앨범을 펼치다.

hohoyaa 2009. 1. 2. 06:53

12월 31일.송년 모임을 끝내고 새벽에 들어 온 남편은 새해 첫 날에도 공연을 하러 나갔다.

매생이 떡국을 끓여 먹으려고 준비했다가 남편이 다음 주에 받게 될 대장 내시경의 주의 사항을 보니 김,미역같은 해조류는 금식하라해서 대신 떡만두국으로 그나마 신정 기분을 내봤다.

날씨도 춥고 아이들에게는 '인디애나 존스' 전편으로 명화극장을 만들어주고 집에 있으려니 오늘 아침 친정 엄마의 말씀이 마음에 걸렸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덕에 한동안 늘 신정을 쇠었던 습관이 있었기 때문일까,오빠네도 못 오고 동생네는 전 날 다녀갔어도 막상 정월 초하루를 두 분이 지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하면서도 쓸쓸한 기분이 드시더라며 전에는 안그랬는데 이젠 늙는가보다라고 자조섞인 말씀을 하셨다.

딸인 나는 웬만하면 명절에 친정 출입을 안하지만(엄마는 올케들 보기 미안하다고 우리가 본가에 내려가지 않더라도 오지않는게 좋겠다고 하신다.) 이번 경우는 부쩍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가 이번에 틀니를 새로하시는 바람에 음식을 통 씹지 못하셔서 많이 마르셨다고 엄마의 걱정이 크셨다.

마침 집에는 매생이와 굴이 그대로 남았으니 아버지가 좋아하시고 씹는 부담이 적은 빵을 만들어 가 매생이떡국으로  두 분을 즐겁게 해드리자고 영화에 빠져있던 아이들을 설득해 같이 다녀 왔다.

 

 

흑미 식빵 믹스에 집에 있던 복분자 엑기스를 조금 넣어 주었더니 색도 진하고 빵이 되는 동안 복분자 향이

참 좋더라.

 

 

다음엔 밀가루에 복분자 엑기스를 넣고 해 봐야겠다.

 

 

엄마가 늘 말씀하시길 집 베란다엔 동백이 한창이라 하셔서 카메라를 들고 가 찍었다.

한참 이뻤는데 이젠 거의 시드는 중이라며 애석해 하시던 엄마.

 

 

그래도 이 두 그루의 동백은 꽃봉우리를 많이 물고 있어서 아마 구정 쯤에는 꽃이 만발 할 것이다.

자연스레 오가던 옛날 이야기 속에 앨범 얘기가 나왔다.

 

 

아주 오래 된 앨범.

할머니와 함께 어려서부터 봐 오던 앨범이다.

 

 

할아버지의 학창시절. 보기에 왼쪽이다.

을사생(1905)이시라 들었고 중앙고등학교 시절엔 야구부에서 야구를 하셨기에 그 사진도 찾아 봤는데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사진.

 

 

할아버지의 청춘시절.

 

 

할아버지,할머니가 함께 찍으신 한 장.

 

 

할머니의 친목회 사진.

1937년이다.

 

 

아마 이것도 친목회 사진인 듯.

앨범을 보니 할머니는 늘 단정한 차림새이시다.

할머니는 생전에 이 앨범을 들추며 젊은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 학교에 갈 일이 생겨 하얀 모시치마 저고리를 입고 가셨더니 학교 애들이 내다보며 우리 학교에 기생이 왔다라고 하는 통에 아버지가 몹시 싫어했다고 하셨다.

지금 봐도 어느 곳에 가시던지 눈에 띄는 외모였겠으나 실제 성격은 여장부스타일이셨다.

할아버지의 사업차 청진에 살기도 하셨는데 그 때 할아버지가 바람을 피우시니까 할머니는 시아버님,그러니까 증조 할아버지께 이혼을 허락해 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 편지를 받으신 증조할아버지는 답장대신 서울에서 청진까지 밤차를 타고 오셔서 며느리를 만류하셨다고 한다.

그 때 할머니는 이혼을 하고 이화여전에 갈 생각이셨단다.

아마 그리 됐으면 누구못지않게 이름을 날리셨을 정도로 기개가 있으신 분이었다.

 

 

1927년,할아버지가 무슨 단체 일을 하셨을까? 

'애우소년중앙지부창립기념'이라 써있다.

 

 

아버지와 어릴 때 죽은 고모들의 사진.

 

 

표정이 요즘 애들처럼 아주 밝다.

할머니는 고모가 크면 승마를 시키고 싶었다고 하시며 가세만 기울지 않았어도 고모대신 나에게 모든 것을 해주었을텐데하고 한숨을 많이 쉬셨다.

 

 

유치원 졸업사진.

 

 

이 사진은 할머니가 다른 딸들과 함께가슴에 묻었던  현수 삼촌.

삼촌은 종로 청운 중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수혈을 잘 못해서 죽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지만 자신의 길을 알았는지 죽기 전날 병원으로 친구를 불러 입학식날 입을 교복과 책등을 주었다고 한다.

의사는 당시에 종로에서 유명한 의사였기에 모두들 소송을 하라 했는데 할머니는 그런다고 한 번 죽은 아들이 살아올 것도 아니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시며 덮으셨단다.

그 후로도 그 병원은 계속 번창했다고.

 

 

아버지의 카톨릭 세례식 사진.

지금은 엄마만 다니시고 아버진 안 다니신다.

 

 

1948년, 아이들의 표정이 해맑다.

아버진 1932년생이니  아닐 것이고 아마도 현수 삼촌의 사진이 아니었을까?

 

 

막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

지금은 두 분 다 미국에 계시고 멀리서나마 소식을 전하실 때면 늘 내 이름을 부르시며 잘 살고 있느냐며 걱정을 해 주신다.

할머니는 이화여전 국문과 출신의 시인이라 하셨는데 인물도 세련된 분이셨으나 직접적인 기억은 없고 주로 건네 들은 이야기가 다이다.

막내 할아버지는 집안 대소사에 늘 혼자 오셨었다.

 

 

두 분의 결혼 사진에 남다른 자태의 여인네가 눈에 띄었다.

영화배우'강숙희'라고 들었다.

이름이나 기억하려고 적어 보았다.

 

 

군인이셨던 막내 할아버지가 월남으로 가시기 전.

내 기억으로 몇차례 다녀 오셨던 것 같고 그 때마다 미군 야전 식량인 C레이션을 갖다 주셨는데 그 안에 있던 햄과 비스켓,사탕,치즈같은 이국적인 맛에 현혹돼 막내 할아버지가 월남에 계속 가시길 소원했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피난에서 돌아와 정들었던 인사동 99칸 집을 이기붕에게 빼앗기고 몸과 마음 모두에 병이 들어 만신창이가 된 할머니의 초췌한 모습이 보인다.

당시 인사동 집엔 객식구가 어찌나 많았던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들고 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셨다 한다.

대가족을 책임진 맏며느리로서 어떻게든 재산을 되찾으려고 수 년간 재판을 했는데 당시의 부통령을 상대로 싸우려니 변호사도 역부족이고 그런 변호사가 못 미더워 법정에서 변호사를 내보내고 할머니 스스로가 변론을 해서  판사에게 대단하시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패소.

인사동 집에 얹혀 살면서 평소 할머니의 그늘에 있던 일가친척들이 모두들 등을 돌려건만 한 번도 할머니 입에서 원망의 소리는 들은 기억이 없다.

다만 그로 인해 집안이 몰락하고 자식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속병이 깊어 돌아가시기 전 며느리나 보자하여 부랴부랴 아버지의 혼사를 추진했는데 집안이 망했다는 사실은 감추고 엄마를 데려 온 것이다.

그런 연유때문인지 할머니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께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휙하고 나가셔서는 한마디도  운을 떼지 않으셨다.

다만 당시 할머니 별명이 '고아원 원장'이었다고만 하시며 아들보다도 주변에서 청을 넣는 사람들을 살피느라 늘 집은 북적댔고 하다 못해 일하던 아이가 시집을 가도 예단을 딸못지 않게 제대로 잘해 주셨으나 다시 찾아 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

엄마의 웨딩 드레스는 한 번 입고 말기가 아까워서 한복에 레이스를 둘러 드레스 모양을 낸 것이라 했다.

아버진 이 사진을 보시며 주레 본 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셨다.

난 할머니께 들은대로 '태완선'이라 했더니 어떻게 알았느냐고 깜짝 놀라신다.

할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정작 아버지 입에서는 이 때 처음 들었다.

엄마는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속아서 시집 왔다고 하시고 아버지는 입을 다무신다.

 

 

결혼식 장에 왠 태극기??

 

 

 

우리 삼남매와~.

 

 

사촌의 사진도 있다.

 

 

외갓집.

 

 

양쪽 가의 분들이 외할아버지,외할머니시다.

작은집 회갑에 가셨던 듯.

외할아버진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막내로 두셨고 외작은 할아버지는 아들들만 다섯을 두셨는데 어릴 적부터 두 집안의 자손들이 잘 지냈기에 사촌간이라는 생각없이 친누이,친오빠,동생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엄마는 당숙모들과 '유녀회'라는 모임을 하고 계시다.

 

 

예전엔 정릉이 근사했다.

아버지가 친구들과 놀러 가셨나 보다.

 

 

엄마의 간호사 시절.

 

 

엄마의 젊은 모습 컬러 사진.

 

 

오빠의 모습도 보인다.

등산 가면서 저 커다란 카셋트 플레이어는 왜 들고 다녔는지. ^^;

 

 

 

오빠는 군대 가기 전 대학 동아리에서 허슬을 가르칠 정도로 춤을 잘 췄다.그래서 군대에 가기 전 날은 명동이 떠나가도록 요란하게 환송 파티를 받느라 집에는 들어 오지도 않고 군대에 갔다. 

태권도 유단자라 군대에서는 태권도를 가르쳤고 스케이트도 잘타서 사단별 스케이팅 대회에서 늘 1등을 해 포상 휴가를 자주 나왔었는데 사회인이 되어서는 건강관리 차원에서 헬스를 하다가 저렇게 육체미에도 관심을 가졌다.

사내 노래자랑에서는 서울 패밀리의 '지난 날'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몇년 연속 1등을 하기도 했으니 정말 재미있는 청춘을 보낸셈이다.

지금도 우리 상혁이에게 장난도 잘 걸고 춤이나 노래로 재미있게 해주니까 상혁이는 큰외삼촌을 젤 좋아한다.

 

 

결혼 전 부모님과 진해 군항제에 다녀 온 사진.

난 이 사진이있는 것도 몰랐고 엄마하고만 다녀 온 줄 알았더니 이번에 처음 아버지도 함께 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여행은 전적으로 내가 모시고 간 것이라 하나에게 자랑을 좀 했다.

 

 

외할아버지의 장례.

 

 

부모님이 하와이 여행 가시기 전 공항에서 하나와 할머니.

저 앞머리는 내가 잘라 주었다.ㅎㅎㅎ

모두들 잘 못 잘랐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저 귀엽기만 하다.

 

 

이번에 보니까 사진이 많이 없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당신 스스로가 정리를 많이 하셨고 남은 것 중 아버지가 또 정리를 하신 눈치이다.

아버진 올해로 78세이시니 저 위의 사진중에는 80여년이 넘은 사진도 있다.

내가 할머니와 함께 봐 오면서 좋아하던 사진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런 사진들도 모두 사라졌다.

사진을 왜 없애느냐며 내가 추억할 테니 그냥 두시라고 했더니 그까짓 사진.......하시며 말꼬리를 흐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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