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작가의 제1차 대전 체험을 바탕으로, 평범한 병사가 견뎌 내는 전장을 감정의 개입 없이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허황된 애국심에 들뜬 담임선생의 권유로 반 친구들과 함께 입대했다. 입대해 보니, 그리고 전장으로 와보니 생각했던 어느 것과도 달랐다. 전쟁 속에서 그저 생존과 기본적인 욕구 외에는 안중에 없는 기계로 변한 그들은, 만일 평화가 온다고 해도 다시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있을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그들의 인간성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전장 속에서 피어난 전우애이지만, 그 역시 허망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공을 포함하여 친구들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20세기식 전쟁 비극의 창조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898년 독일의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났다. 가톨릭계 사범 대학을 다니다가 18살 때 징집되어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훈장을 받고 제대하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사직한 뒤 세일즈맨, 사서, 피아노 교사, 연극 평론가, 광고 카피라이터, 스포츠 잡지 편집자 등을 전전하다가 1929년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출간되면서 대성공을 거두고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반전사상을 명확히 한 레마르크는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던 나치와 잦은 충돌을 일으켰고,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레마르크의 책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레마르크는 망명 작가로서 스위스에서 거주하다가 2차 대전 직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할리우드에서 각본을 쓰고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개선문』,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등 대표작을 꾸준히 집필했다. 두 차례의 대전으로 공통된 기억과 고통을 갖게 된 동시대인들에게 레마르크의 사실적이고 서정적이며 가식 없는 문체는 엄청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예스24
어렸을 적에 그런 꿈을 자주 꾸었었다.
전쟁이 나서 도시가 파괴되고 간신히 포격을 피한 낮으막한 벽돌담아래 웅크리고 앉아 우리 편이 날 구하러 와주길 기다리는 꿈. 시간이 가면서 꿈도 업그레이드되어 담벼락에서 뛰쳐나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가로질러 달리면서도 계속 머리속에서는 이런 스토리가 아닌데... 그냥 숨어있다가 깨어나야하는데... 넘어지기 전에 깨어나야하는데...그러다가 앞에서 커다란 빛으로 터지는 폭발을 보면서 깨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을 나는 전투기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골목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 세대는 고작 TV드라마에서 전쟁에 관한 정보를 받아 나름대로의 전쟁터를 만들어냈다. 이후로부터 듣거나 읽게되는 모든 전쟁 이야기는 내가 상상한 전쟁터에서 벌어지고 흑과 백이 분명하게 나뉘며 캐릭터 또한 나쁜 놈은 무지비하고 못생겼으며 우리 편은 언제나 신사이고 친절한 내면이 용감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중학교 때 레마르크의 소설을 접하기 전까지의 모든 전쟁은 질리다시피할 정도로 똑같은 패턴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꿈속같았던 10대 소녀는 레마르크 소설의 한 문장에서 충격을 받았다.
때는 1월인가 2월인가 엄동설한이 지나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하던 러시아 전장이었다.
주인공 부대원들은 정찰을 나갔다가 녹은 눈사이로 드러나는 시신들을 헤쳐보며 쓸만한 장화가 눈에 띄자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 장화를 벗겨낸다. 그렇게 좋은 장화는 이미 죽은 자에게는 불필요하니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말이다. 얼었다 녹은 시신이 물컹해져 장화에서 빠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제껏 내가 구축했던 전장의 셋트장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호르몬 생성이 불안정한 성장기에 꾸던 전쟁꿈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차차 그 횟수가 줄어들게되었고 압도적인 비쥬얼과 음향효과로 우리의 오감을 사로잡는 허리우드판 전쟁영화에 눈이 멀어 눈과 함께 녹아내리는 러시아전장의 시신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또 한 번 내 마음을 사로잡는 전쟁영화를 발견하게되는데 그것이 "The Thin Red Line , 1998 "이었다. 그 영화에서 처음 보았던 '애드리언 브로디'는 우리가 흔히 봐 오던 용맹한 병사가 아니었다. 죽음에의 두려움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보면서 가슴이 턱 막히는 경험을 했다. 그 영화를 보고 느낀 소감은 이제껏 보았던 전쟁영화중에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전쟁영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괄작인 전쟁의 두려움이 아닌 개인으로서 전장에 내몰린 개인이 느끼는 극한의 공포를 그려낸 그 한 장면이 두고두고 뇌리에 남는 영화였다.
책이야기를 하다가 영화로 빠지기도 하는 내멋대로의 독후감이라 또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전쟁영화가 있다. 사위가 조용해서 심장박동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긴장감이 팽배한 장면이 관객을 사로잡는 "The Hurt Locker, 2008". 영화 속에서 홀로 폭발물 해체를 하는 주인공 '제레미 레너'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고향에 안착을 하는가 싶더니 곧 다시 전쟁터로 떠난다. 일상의 자잘한 소음이 있는 보통의 삶터가 방호복을 입고 홀로 폭발물과 마주하던 그 순간보다도 더 그를 압박하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일련의 기억을 따르다 보니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레마르크가 그리고 싶었던 것들,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이들 영화에 담기지 않았을까 싶다. 담임의 선동에 소년병사가 되었으나 정작 그 담임은-어른들은,전쟁을 일으킨 위정자들은 전쟁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휴가나온 아들에게서 무용담을 듣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남들 앞에서 떠벌이고 싶어서이다. 전쟁을 모르니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지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휴가를 갔던 짧은 시간에 그가 느낀 것은 안락함이 주는 느긋함대신 현실과의 괴리감이었고, 전우들이 함께 있던 위험한 곳이 그에게는 더 마음 편하다는 사실, 그리고 같은 것을 느끼고 서로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그들이 바로 진짜 가족이었고 전장이 고향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이제 더는 청년이 아니다. 우리에겐 세상을 상대로 싸울 의지가 없어졌다. 우리는 도피자들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세상과 현 존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에 대고 총을 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터진 유탄은 바로 우리의 심장에 명중했다. 우리는 활동, 노력및 진보라는 것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살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의 실체를 믿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오직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 책속에서
전쟁의 회의론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지금도 세상 어느 곳에서는 당시보다 더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일선에는 어김없이 어린 병사들이 총알받이로 나서고 있다. 그들은 그저 죽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이 아무리 많이 죽어도 세계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장 연약하고 예민한 솜털보숭이 그들은 그들이 왜 죽는지 무엇을 위해 죽는지도 모르고 계속 죽어간다. 더구나 앞으로의 전쟁은 핵과 첨단 무기와의 전쟁이라 일순간에 끝나 버린다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에 나오는 청년들이 차라리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 날 <서부전선 이상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엎드린 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몸을 뒤집어 보니 그가 죽어 가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된 것을 마치 흡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무척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싱싱한 것의 만남.
--- 책의 마지막
의도치 않았지만 책부족 10월의 책인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주인공 파울은 10월에 죽었다.
창밖의 단풍으로 계절을 기록해 본다.
**사족)
아마도 개선문을 먼저 읽었을까? 언제나 그렇듯이 레마르크의 작품들을 몰아 읽기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내게 충격을 준 그 작품이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인 줄 알고 있었기에 이번 책부족 독서목록에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추천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책이 아닌기라~, 그 장면이 나오는 작품이 무엇인지 생각이 안나 목에 가시처럼 껄끄러웠는데 레마르크의 다른 작품들은 흝어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사랑할 때와 죽을 때"였을 것이다.
'부엌에서 책읽기 > 책장을 덮으며(book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던 시크 코바늘 손뜨개 (0) | 2016.06.24 |
---|---|
알록달록 코바늘 손뜨개 소품 (0) | 2014.11.30 |
책읽는 부족들은 지금? (0) | 2014.05.28 |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 서머싯 몸 '면도날' (0) | 2014.03.06 |
삶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다-앨리스 먼로 단편집 (0) | 2014.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