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의 원작자는 박범신이다.
돌이켜보니 박범신이라는 이름 석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청춘을 보냈다.
그의 작품으로 생각나는 것은 정윤희가 나왔던 '죽음보다 깊은잠',
영화개봉 당시 내가 미성년자라서 보지 못했던 영화이고 그리고 '풀잎처럼 눕다'도 있었는데 그역시 그렇다.
영화 제목이 참 회화적이라 두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이었는데 야한 영화라는 선입견이 있었기에 전신주에 붙은 포스터만 곁눈으로 흘깃거릴 뿐 바쁜 걸음을 옮기던 여고생이었다.
영화는 어느새 극장에서 간판을 내리고 나는 성인이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책으로나마 접해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서야 '은교'를 보았다.
처음엔 원작이 박범신의 '은교'라해서
홍보문구에는 노출수위라는 단어가 늘 따라다녀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해일이 노인분장을 했다해서-젊은 사람이 노인분장을 한 영화는 별로 끌리지 않아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이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감상평이 의외로 좋아 티켓을 끊어 친구와 봤다.
역시 짐작대로 노인분장은 거슬렸다.
분장의 기술적인 문제뿐 아니라 시인 이적요를 대하는 동안 늘 젊은 배우 박해일의 그림자가 어른거려서 몰입을 방해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70대 노인배우를 세워야할 필요는 없지만 감독이나 배우나 노인을 노인의 얼굴이 아닌 표현하는 몸짓으로 좀 더 연구했었더라면 싶다.
노인이란 단순히 육체의 늙음은 아니다.
노인의 시간은 관조의 시간이고 밖으로부터의 자극에 둔감래지는 시간이며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가올 미지의 시간을 준비해야하는 시간이기에 그만큼 자신의 내면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영화가 70대 시인 이적요의 늙음을 단순히 분장으로 커버하려 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보는 관객의 입장으로서는 마치 화장발을 세운 젊은 여자의 치기비슷하게 여겨졌다.
울림좋은 목소리와 연기력, 게다가 티켓파워까지 있는 박해일.
그런데 이번에 그가 연기한 노시인 이적요에게서는 여유로운(?) 노인이 아닌 분장 자체가 어색한 박해일의 조급함,긴장감이 물씬 묻어났다. 더구나 특수분장을 확인시키려는 듯 클로즈업이 많은 것도 거슬렸다.
인간에게는 주변공기의 흐름이 있다.
노인분장의 유무를 떠나 몸놀림이나 자세등으로도 충분히 노인의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극장의 공연에서처럼 스크린에서 극장전체로 전체로 전해져오는 그런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시인 이적요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착각하는 뇌덕분이리라. 영화속에서 감독의 의중이 제대로 맞아 떨어진 것은 이적요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은교와 '나 잡아봐라~!'인데 그 장면은 진짜 모래바람 자욱한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이시스같다고나 할까. 저 젊음이 바로 이적요로구나, 박해일이로구나 싶었다.
'은교'의 주인공은 은교이다.
은교는 나무랄데 없이 좋았다.
이적요도 서지우도 은교를 돋보이게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 새 은교에 푹빠진 자신을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제일 처음 한 말은 "은교, 이쁘다."였다.
그 젊음이 순수함이 이쁘고 깨끗해서 좋았다.
유리를 닦는 은교의 손길에서 내 마음도 맑게 닦여지는 느낌이었다.
70대 노인이 10대 여고생을 사랑한다는 홍보문구와는 달리 내가 본 은교는 이렇다.
이제는 몸도 기력도 쇠잔하여 새로운 창작에의 열정도 사라져버리고 고독감이 가득한 집에 칩거하던 노시인의 마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문학적 구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더이상의 창작은 없을것이라 예상했던 서지우로서도 스승의 육필원고를 보는 순간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스승의 부활을 두려워했을 수 있겠다.
이적요가 탐하던 은교는 단순한 사랑만은 아닌 것이다.
은교,좋았다.
그래서 근 30년만에 처음으로 박범신의 책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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