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치매 초기 증상

hohoyaa 2007. 2. 11. 21:30

지난 2월초,시즌 작품이 시작되어 오랫만에 회사에 나갔다.

변함없이 자릴 지키고 있는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홀짝이는데 우리 팀 감독님이 지나가며 한 말씀 하신다.

지난 번에 끝낸 작품을 보니까 내가 시트(time sheets)를 잘 못 기재해서 뒷 파트가 애를 먹었다나 어쨌다나.

 

애니메이션은 1초를 24콤마로 나누어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내가 하는 일은 key가 되는 그림을 그린 후 중간에 어느 정도의 타이밍으로 몇 장의 그림을 넣어 주어야 하는지를 숫자로 표시해 시트에 적어 주는 일이다.

드라마로 보면 일종의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할 적에는 문제가 있을 시 다른 파트와 협의하에 원활히 돌아 갔었고,중간에 실수한 것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숫자나 기호를 덧붙여 고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제 촬영까지도 디지털 작업이 되면서는 일이 더 까다로워졌다.

이 컴퓨터라는 놈은 도대체가 융통성이라고는 없어서 알파벳이나 특수 기호,어쩌다 숫자가 중간에 빠지거나 중복이 되면 아예 인식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트가 몇 장씩 되고 레벨이 몇 단계씩 되어서 그림의 매수가 100 장 이상이라도 되는 컷트는 그야말로 쓰는 나나 보는 남이나 똑같이 머리가 지끈 지끈하고 눈이 핑핑 돌 지경이다.

 

감독님 말씀에 그럴리가 없다고 발뺌을 해 봤지만 이젠 나도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 한지가 한 참이니 그저 억울한 듯 수긍하는 수 밖에...

'그랬을까요? 내가 잘 쓴다고 썼는데...' 하는 나에게

'큰일이네~.숫자가 헛갈리기 시작하면 치매 초기라는데...' 라며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든다.

욱~!

그렇지 않아도 내가 치매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일급 비밀인데...이것 때문에 같이 일 못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며 애써 너스레를 떨어도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하다.

누구는 치매 보험까지 가입해서 한달에 200만원씩 낸다는데...

나도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것 아닐까?

 

요 며칠 전엔 하나네 학교가 임시 휴교라 상혁이는 유치원 보내 놓고 하나 아빠랑 셋이서 컴퓨터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하나가 커서 이제는 이런 시간도 같이 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소음에 방해 받기 싫어서 방문까지 닫고 영화를 봤다.

영화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는데 영화가 어찌나 긴지 중간에 한 번 일어나 화장실을 갈려다가 아무도 안 움직이는데 내가 혼자 풀썩거리며 일어 서면 분위기 망칠까 봐서 꾹 참고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내 전화 벨이 울렸다.

아이 참, 눈치없이 누가 이런 시간에 전화를...

마루로 나가 전화기를 찾는데 뭔가 매캐한 냄새가 난다.

곧이어 하나 아빠가 뛰쳐 나왔다. '앗!!'

 

전 날 하나 아빠가 김치 찌개를 끓여 놓고 외출 했는데 외할머니가 불고기를 재 오셨다고 애들이 김치 찌개는 안 먹고 고기만 먹었나보다.

그 날 아침, 밤새 국물 맛이 진국이 된 김치 찌개랑 밥을 맛있게 먹었다.

하나는 역시 아빠의 김치 찌개가 최고라며 밥을 세그릇이나 먹고 더 먹겠다는걸 점심 때 먹자고 했는데

영화 볼 준비를 하면서 꼼꼼한 이 남자 ,김치찌개를 가스 불에 올려 놓은 것이다.

그러곤 잊어 버리고...

영화가 두시간이 넘는 것이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찌개가 타다 타다 도자기 냄비랑 한 몸이 되어 있었는데 그 때까지 우리 셋 중 아무도 냄새를 못 맡았다.

다만 밖에서 빠직 빠지직 하는 소리가 신경 거슬린다며 뭔소리여? 하긴 했어도 아무도 나가 보질 않았다.

뒤 늦게 나는 물 한잔 마시고 싶었는데...그 때 나갔더라면.

           난  사탕을 가져 오려고 하다가 참았는데...그 때 나갔더라면.

           난 커피 타 오려고 했는데... 그 때 나갔더라면.

하나는 또 못 먹은 김치 찌개가 아까워서 난리더니 'ㅇㅇ이모는 좀더 일 찍 전화 하시지~^^;' 로 맺음을 했다.

이틀 후 정기소독 때문에 관리 업체에서 방문을 했는데 무슨 탄내가 난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 마스크까지 하고 계시더만 ...

내가 이틀 전에 찌개를 태웠는데 아직도 냄새가 나느냐고 했더니 '그럼요,문 열자마자 나던걸요? 냄비 다 버렸겠네요.?'

'아뇨. 도자기 그릇이라 닦아 내니까 감쪽 같더라구요.^^'

난 냄비는 쓸만하다는 것을 내 세워 힘을 주어 말했다.

남편은 자기가 태웠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냐며 은근히 찌개 사건을 즐긴다.

 

에고~,애 둘 낳은 그렇다 치고 이젠 남편마저도 깜빡 증상이 생겼으니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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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23

 

이  글을 쓰려고 할 때만 해도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쓰면서는 까맣게 잊어 버리고 오늘 다시 덧붙인다.

그러니까 가계부에 관한 것이다.

올해부턴 가계부를 쓰기로 하고 주말이면 총 지출 결산을 했는데 어느 날은 예상외로 큰 돈을 쓴것이 드러났다.

그 주의 행사를 보아하니 별로 특별한 날도 없는데 지출이 돈 백만원이 넘는것이다.

깜짝놀라 나도 모르게 가계부를 닫고 말았다.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누가 알새라 혼자서만 끙끙 앓으며 어디에 썼더라?어디에 썼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난다.

다시 한번 가계부를 들여다 본다.

이상하다? 이상해!

다시 봐도 하루 하루 쓴 지출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데 한주일 결산이 100만원이라니...

역시 이래서 가계부를 써야 하는것인가 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내가 이렇게 민할 수가 있을까?

그 큰 돈을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일에 쓰다니...

그저 슈퍼와 마트 그리고 애들 교육비 정도인데,,,가만 장을 얼마나 봤나?

목록을 보아도 그저 그런것 들이다.

그렇게 혼자 고민하고 겁이나서 가계부도 다시 못 열고 며칠이 흘렀다.

그래도 가계부는 계속 써야 하기에 날마다 적으며 되뇌였다.

이렇게 적다 보면 일주일에 100만원이란 말이지?? 정말 돈 쓸데가 없네.쩝.

다시 이전 페이지를 펼쳐 놓고 머리를 갸우뚱한다.

그리고 펜으로 계산을 해 본다.

틀.렸.다.

내가 전에 계산기로 계산한 것이 틀렸다.

무얼 잘못 눌렀는지 그 때 것이 틀렸다.

8만원 정도가 총 지출이었는데 계산을 잘못해서 100만원이 넘게 나온 것이고 이 미련한 아줌마는 또 그걸 곧이 곧대로 믿고 혼자서 몇날 며칠을 고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