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책읽기/책장을 덮으며(book review)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 프랑수아 가르드

hohoyaa 2013. 11. 27. 21:43
탐험의 역사에서 분수령은 18세기였다. 그전까지 '발견'은 황금이나 향신료를 찾아낸 다음, 그것을 생산하는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계몽주의 학자들이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을 연구하면서, 탐욕은 탐구 정신에 자리를 내주었다. 부, 영토 획득, 국가의 명예 등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존재했다.그러나 이제 탐험의 목적이 지구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졌다.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들은 이제 해적이 아니라 연구자들이었다. 사람들은 연구자들이 여행에 관한 충실하고 정확한 이야기를 전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중략 -

1820년대가 되자 탐험가들은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들의 일기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처음보는 사람들이 그들과 악수를 하려고 길을 건너왔다. 그들은 명예를 얻고 다시 시도하라는 격려를 받았으며, 대개 재도전에 나섰다. 늘 발견할 것이 남아 있었고, 대중은 늘 멋진 그림이 들어간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를 원했기 때문이다.

                                                                  퍼거스 플레밍과 애너벨 메룰로의 '탐험가의 눈'에서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의 눈부신 고찰
첫 소설에 수여하는 2012 공쿠르상 수상작

2012년 공쿠르 신인상을 수상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되는 개념을 몸소 경험한 실존인물 ‘나르시스 펠티에’의 삶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강력한 서사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페이지를 쉼 없이 넘기게 하는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첫 소설에 수여하는 공쿠르상을 비롯한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나르시스의 과거를 다루는 장과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이 파리 지리학회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소위 ‘야만족’의 재사회화를 거치며 문명의 기억을 모두 잊은 나르시스와, 그를 맡아 거둔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 둘 사이의 교류가 깊어질수록 나르시스는 문명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고, 옥타브는 그간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문명/야만’, ‘이성/광기’, ‘진보/퇴행’ 등의 대립항이 산산이 부서져 나감을 깨닫는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두 번씩 넘나든 나르시스 펠티에. ‘야만’의 세계, 즉 모든 상식과 관념, 사용하는 언어조차 모두 다른 세계에서 나르시스는 소통의 단절을 맛본다. 그의 내부에서는 ‘선원’과 ‘야만인’라는 두 가지 자아가 싸움을 벌인다.
영혼의 내면이 ‘전쟁터’처럼 너덜너덜해진 나르시스는,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자신의 실존을 찾아 나아간다. 시련 앞에서 굴복하지 않은 한 인간의 위대한 생존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가져다준다.

 

                                                                                                                  예스 24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1844년 프랑스 방데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나르시스 펠티에'는 스쿠너 선 생폴 호의 견습선원시절인 14살 되던 해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실종되어 17년간 야만인(?)들과 생활하다가 1875년 우연히 그 곳에 기착했던 영국선박 존 벨 호의 선원들에게 발견되어 문명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탐구와 호기심으로 충만하던 시대이며 프랑스 왕립지리학회의 통신회원 '옥타브 드 발롱브룅 자작'역시 극지탐험을 하면서 지도 제작에 열정을 바치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후 다음 목적지로 태평양 연안을 정해놓고 시드니에 머물던중 프랑스 출신의 흰둥이 야만인을 만나게 되어 학회장에게 서한을 보내게 되는데 그 서한에서 이미 문명의 선을 넘어 야만의 땅에서 적응한 나르시스라는 인물을 다시 문명으로 데려오려 노력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다루어져야할 것은 충분히 다루어졌다고 본다.

 

옮긴이의 말을 빌면 1876년 발간된 '콩스탕 메를랑'의 "야만인들과 함께한 17년의 세월;나르시스 펠티에의 파란만장한 인생" 과 같은 증언자료에 의거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자료가 공개된 것은 나르시스가 발견 된 후 1년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않은 것이라 머리를 갸웃하게 된다.

책을 보면 나르시스가 처음 발견되었을 적에는 자신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도 모른채 혼란스런 와중에 언어또한 통하지 않았고 행동또한 여타 야만인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짐승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었다. 그 후 차차로 단편적이나마 프랑스어를 기억해내고 추론하며 소통을 하기도 했다지만 실제로 그가 대화다운 대화를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더욱 심도있게 관찰하거나 인터뷰를 하기에는 역시 당시 사회의, 아니면 '콩스탕 메를랑'의 인내심이 부족했던 듯하다.

한 인간을 더구나 어린 나이에 두개의 세계를 경험하고 장년이 되어 다시 문명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유사이래 최초의 인간을 정의하기엔 일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이 아닐까?

아마도 프랑수아 가르드도 그 자료에 갈증이 생겨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콩스탕 메를랑은 왜 일년이라는 시간밖에 허락되지 않았음에도 서둘러 결론을 내려했을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마지막에 나르시스가 자신에게서 듣고자하는 모든 질문의 답으로부터 종적을 감추는 장면을 보고서야 이해를 하게 됐다. (실존 인물 '콩스탕 메를랑'이 이책에서는 '옥타브 드 발롬브룅'으로 그려졌을 것이라 짐작하고 글을 쓴다.)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이  '나르시스 펠티에'가 해안에 남겨진 이 후부터 존 벨 호의선원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그 17년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자 "말하는 건 죽는 것과 같아"라는 말만을 반복하며 애써 그 시간을 부정하는 말만을 하고 결국 다음 날 나르시스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취를 감춘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두세계를 경험한 사람이 처음으로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야만인으로 살았던 17년은 '나르시스 펠티에'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그 곳에서 가족을 이루고 자식까지 두었으니 그렇게 부정한다고 부정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20대를 그 곳에서 보냈으나 문명의 시선으로는 그 시간이 조롱거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자신만의 기억속에 남기고자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정체성의 혼란이 와서 본능적으로 도망을 쳤을 수도 있겠지만 나역시 그 17년에 관해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르시스라는 인간을 관찰의 피사체, 탐구의 대상으로 보았던 시각을 비판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나도 나르시스의 잃어버린 17년이 무지 궁금해졌다. 만약 발롬브룅의 뒤늦은 후회처럼 처음부터 나르시스의 정신적 충격을 살피는 방법으로 접근했더다면 그 증겨자료가 더 풍부해지고 후세의 호기심도 충족되었을까?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탐험가의 눈
정영목 역/애너벨 메룰로 편저/퍼거스 플레밍 편저
로빈슨 크루소
대니얼 디포 원작/윤종태 그림/신윤덕 역/김준우 해설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저/성귀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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