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은교'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책을 덮고 나니 내가 영화로 느꼈던 감상들이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영화; 은교는 이뻤다. http://blog.daum.net/touchbytouch/16847736
내가 원작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영화에서 서지우가 훔쳐낸 소설의 제목이 '은교'라서 은교는 이적요의 문학적 구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면에서 내가 헛다리를 짚었구나싶다.
변호사의 기록,이적요의 기록,서지우의 기록으로 이루어진 구성이 필연적이지못하고 어째 좀 아류에 머무는 것처럼 아쉽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마치 덜익은 음식을 앞에 놓은 모양으로 책을 읽었다.
그만큼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글의 말미에 언급되어지는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 그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진지하게 읽었던 기억때문에 '은교'가 아류로 느껴졌던 것이었나 보다.
원래 박범신의 작품스타일이 그런지 인물들간 개성없는 단어들의 나열과 수많은 인용구들,그리고 결국에는 작가 자신의 작품들까지(토끼와 잠수함,죽음보다 깊은 잠)도 버젓이 한 자릴 차지하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밖에.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밤에 썼으니 밤에만 읽으라했고 한 달 반 만에 완성을 했다고 한다.
박범신의 나이가 올해 몇이런가?
문득 이적요가 박범신은 아닌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밤에 쓴 편지는 반드시 아침에 다시 읽어보게되고 결국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될진대
작가는 밤에 쓴 이 소설을 아침에 발표하더니 밤에만 읽으라고 당당하게 고하고 있다.
읽다 읽다 그의 말대로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읽어보았다.
차라리 하룻밤만에 쉽게 읽고 털어냈다면 모를까,
책의 두께에 비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다보니 책을 덮을때쯤엔 내가 점염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역시
젊은사람들은 아직 그 의미를 모를 늙는다는 것.
정신과 육체의 부조리함.
그 심오한 주제가 가비얍게 다루어진 것 같아 아쉽다.
무어라 무어라 주절거리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정리도 안되고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젠 나도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 늙어가는 길로 한걸음 다가선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