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길떠나는 가족
분노의 포도는 중학교 때 읽어보고 이번이 두번째이다.
당시에는 내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는 가족구성원의 입장으로 책을 읽었고 이번엔 마땅히 가족들을 책임져야하는 부모의 입장으로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친구네 집에서였다.
친구와는 중학교 때 같은 반에서 만났는데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되어 물으니 같은 동네였던 것이다. 한시간이 넘는 거리를 통학하는 같은 반 학생이라는 우연이 마치 필연처럼 운명처럼 여겨져 우리는 쌍둥이처럼 붙어다녔다.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아버지와 대학생오빠가 있던 친구네는 책이 많았다.
아버지의 실직과 6남매,그리고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셨던 친구의 집은 풍족하지 못했으나 학교가 끝나고 놀러가면 책이 많아서 좋았다.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내가 가면 밥이라도 한끼 챙겨주려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어쩌다 책꽂이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친구의 일기속에서 직업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연민을 읽을 수 있었기에 나는 그 친구의 진짜 친구가 되어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었다. 친구네 집과 우리 집은 몇정거장 떨어져 있었고 어느 방학에 친구네 집에 가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 동네에 들어섰다.
그러다가 길거리 한모퉁이 비닐천막아래에서 과일을 올린 사과궤짝을 앞에 놓은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는 내가 흠칫 놀라서 얼른 숨어버렸다.
사실 그 때까지만해도 시경앞에 있던 광운컴퓨터연구실에 다니는 둘째언니와 고려대학교 휴학생인 큰오빠가 과외로 생활비를 대고있는 줄로 알았기에,그리고 설마 매일 외출을 하시는 친구의 아버지가 벌이가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그렇게 먼지나는 길에 쪼그려앉은 친구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담에 숨어서 밖을 엿보던 나는 친구의 얼굴을 재차 확인하고 이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런지 고민을 했다.
내가 갑자기 친구의 앞에 나타나면 친구가 놀라지 않을까? 모른척 지나가는 것이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아닐까하며 애써 그쪽을 외면하면서 느릿느릿 길을 가로질러갔다.
그 때 내이름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를 도우려 나왔다는 친구의 말에 그 방학에는 종종 친구와 함께 그 천막을 지키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천막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내가 늘 스쳐 지나가는 그 거리와는 달라서 하루가 짧았다.
그 상황에 친구네서 빌려읽은 '분노의 포도'이니만큼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나의 그 시절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작품이다.
톰 조드일가가 집을 잃고 서부로 서부로 가야만 했던 절망과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나는 친구네서 찾으려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친구네를 보면서 위안을 삼는다.
독립운동가의 부인이란 자부심으로 살아오신 할머님과 부모님은 일찌기 돌아가셨지만 친구네 6남매는 모두 성공한 케이스에 속한다. 대기업 CEO에서 사업가로 변모한 큰오빠가 그렇고 결혼도 미루고 동생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던 둘째언니는 현재도 싱글이지만 누구보다 밝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셋째언니는 미국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다. 친구도 그렇고 작은 오빠나 남동생도
세상적으로 성공을 했지만 모두들 가치관만은 그 때와 다름없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
친구네 6남매는 지금도 똘똘 뭉친다. 그 힘은 약한 여자의 몸으로, 때로는 트럭과 트럭사이에 끼이는 사고를 당하면서까지 놓지 않았던 어머니의 자식들을 향한 교육열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드 일가역시 고향을 떠나 올 적에는 남자들의 힘이 작용했지만 결국 난관에 봉착했을 때 큰힘을 발휘하는 이는 어머니였다.
길떠나는 조드일가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친구네가 그러하듯이 시대마다 늘 새로운 모습의 조드일가가 있어왔다.
조드일가의 집과 땅을 갈아엎던 트랙터가 지금은 정리해고라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외관이 보기좋은 도시를 만들기위해 원주민들을 원치 않는 곳으로 내모는 개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누구나 대학가는 세상을 만든다더니 그 대학은 신용불량자를 양성하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내가 내 손으로 지은 거야. 헌 못을 두들겨 펴서 지붕 널빤지를 붙였다고. 서까래는 짐을 쌀 때 쓰는 철사로 도리에 동여맸지. 그 집은 내 거야. 내가 지었어. 자네가 그 집을 들이 받으면,내가 창문에서 자네를 쏠거야. 그냥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내가 자네를 토끼처럼 쏴 버릴 거야."
"제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저도 어쩔 수 없다고요. 그렇게 안하면 목이 잘리니까. 아저씨.아저씨가 절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그 사람들이 아저씨를 교수대로 보낼걸요. 게다가 아저씨가 교수대에 매달리기 훨씬 전에 나 말고 다른 놈이 트랙터를 몰고 올거에요. 그놈이 아저씨 집을무너뜨리겠죠. 절 죽여 봤자 소용없어요."
"그래? 자네한테 명령을 내린 놈이 누구야? 그놈을 잡아야겠어. 그놈을 죽여야겠어."
"아저씨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그 사람도 은행에서 지시를 받은 거에요. 은행이 그 사람한테 사람들을 쫒아내지 못하면 그 사람이 쫒겨날 거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럼 은행 총재가 있을 거 아냐? 이사회도 있을 거고. 총에다 총알을 가득 채워서 은행으로 가야겠다."
"누가 그러는데 은행은 동부에서 지시를 받고 있대요. '땅에서 이윤을 내지 못하면 은행을 폐쇄해 버리겠다.'이랬대요."
"그럼 어디가 끝이야? 누굴 쏴야 되는 거냐고? 난 굶어 죽기 전에 날 굶기는 놈을 죽일 거야."
"저도 몰라요. 어쩌면 아저씨가 죽일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도 모르죠. 어쩌면 사람이 문제가 아닌지도 몰라요. 아저씨 얘기처럼. 어쩌면 땅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어쨌든 전 제가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아저씨한테 미리 얘기해 드렸어요."
"방법을 찾아야 해. 우리 모두. 이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이건 벼락이나 지진하고 달라. 이건 인간이 저지른 짓이라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막을 수 있을 거야."
소작인은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었고 운전사는 천둥같은 소리를 내며 트랙터를 몰았다.
.
.
.
소작인은 소총을 손에 들고 트랙터의 꽁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아내가,뒤에는 조용해진 아이들이 있었다. 모두들 트랙터의 꽁무니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