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 부성애의 막다른 길
사진은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상이다.
로댕의 섬세한 조각품들과는 달리 이 발자크상은 무슨 보따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로댕은 이 작품에서 발자크의 몸통을 대담하게 생략하고 발자크의 두상을 유난히 강조했다고 하는데 이는 곧 발자크의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대의 문인들에게서는 몰이해로 인한 질타와 따가운 시선만을 받았다고 한다.
발자크를 알기는 아는데 그의 '인간희극'을 읽어보지 않았고 '고리오 영감'도 기억에 없으니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작가연보에서 '골짜기의 백합'을 보고서야 내가 아는 발자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골짜기의 백합'이 사춘기소녀가 읽기엔 잔잔한 재미는 있었을지언정 세계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에는 의문이 있었기에 발자크가 위대한 작가라는 수식어는 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고리오 영감은 무언가 다른 힘을 갖고 있을까?
일단 처음 책을 시작하면서는 마음이 편했다.
지난 번의 '불멸'에 비한다면 엣날 이야기를 읽듯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리오 영감.
영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왠지 섬뜩하고 수전노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갖고 있을 것 같은 고리오 영감.
그런 선입견을 갖고 책을 읽다가 자신과 딸들을 망쳐버린 - 한없이 갓길로 빠져버린 부성애를 만났다.
ㅎㅎ 이 문장의 dash도 발자크가 처음 사용한 것이란다.
고리오 영감은 격동의 시기에 밀가루로 큰 돈을 번 제면업자였다.
신분은 낮아도 재력이 있었기에 딸들에게는 최고의 가정교사를 붙이고 최고로 좋은 것만을 해주며 딸들이 사교게를 통해 귀족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만약 고리오가 조금만 깬 사람이었다면 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이나 사교계를 통한 신분상승이 아닌 것을 알았을진대 그 역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상인이었기에 그저 맹목적인 사랑만을 퍼부었다.
그 결과로 그의 딸들은 마지막까지도 가난한 아비에게 매달리며 도와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어가는데도 딸들은 그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자신들이 기댈 언덕이고 자신들을 위해 전당포에 들락거려야하는 존재이기에
그의 죽음은 앞으로 그들이 가난하게 살아야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고리오 영감은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잘못 살았음을 깨닫고 절규하지만 마지막까지도 놓지않는 그의 자식사랑 또한 그에 못지 않아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도 한다.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는 자식사랑인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교육열도 결국은 신분상승의 통로구실을 하는 것인데
법학도 으제니가 좀더 쉬운 방법으로 사교계에 발을 들이고 스폰서를 잡아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키고자하는 것과 오늘 날의 결혼이 많이 닮아있다.
공부를 잘해야 출세한다,공부를 잘해서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능력있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부추기고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이나 으제니,고리오영감이나 오십보 백보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200년이상이나 전에 발자크는 이런 비극적인 세태를 예견하였음에도 우리는 그대로 그 궤적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역시도 그 궤적에서 튀어 나오지 못하고 돌아보면 같은 발자국안에 있는 것이기에.
고리오 영감을 설명하는 뒷표지를 보면 "'고리오 영감'은 발자크의 대작 '인간희극'의중심에 위치한다. 다양한 자본주의적 인물군의 관계망속에 부르주아 노인의 점진적 쇠락과 귀족청년의 상승 욕구를 대비시켜 19세기의벽화를 완성하고 있다."라고 나와있다.
발자크가 어떤 작가인지를 생각하는 가운데 후니마미님이 이불공주님의 독후감에 쓴 댓글을 보니 왜 리얼리즘인가 알것도 같다.
어제 오늘 읽은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보니, 이 사람이 발자크에 관해서 써놓은 글들이 눈에 띄더군요
이 소설의 뒷장에 쓰인 역자 후기 보다는 밀란 쿤데라의 발자크 론이 훨씬 이해하기 쉬었고, 이 소설 고리오 영감의 돈이 그저 물품 교환가치만이 아니라
그 시대 소설에 <돈>을 소설 내용에 집어 넣었다는 겟에서 발자크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소설은 이미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가게 될 것인지를 한 발 앞서서 보여주었다고나 할까요?
이미 만연해 있을 때는 그 가치에 대해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소설가의 모습이라고 밀란쿤데라는 말하더군요.
브리태니커를 찾아보니 '인간희극'은 인물들의 재등장을 통해 현실세계에 바탕을 둔 자신의 상상세계에 일체감과 일관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활기넘치고 수다스럼고 건강하고 쾌활하고 이기적이고 남의 말을 잘 믿고 허풍을 떠는 사람이었던 발자크는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명문귀족가의 문장을 자기 것인양 사용하였고 귀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전치사 드(de)를 자기 이름에 붙였다.그는 명예와 재산과 사랑에 굶주려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천재성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남을 매혹시키는 말재주가 좋아 사교계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교계출입은 엄청나게 고된 창작생활에서 잠시 숨돌리는 휴식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수도사같은 실내복을 입고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셔가면서 거위깃 펜으로 하루 14~16시간씩 글을 써냈다고 한다.
그런 그도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떴는데 그가 마지막까지 부르던 이름은 '고리오 영감'에서 으제니의 친구로 나오는 의대생 비앙숑이었다고 한다.
비앙숑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면서까지 자신의 생에 강한 집착을 보인 발자크.
그런 인간적인 면이 있기에 '인간희극'을 탄생시킬 수 있지않았나 싶다.
고리오 영감은 가고 없지만 고리오 영감의 미망인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 사회다.
고리오 영감(세계문학전집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