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살 만지기(companion )

남편의 휴대폰속, 아내인 나는 9번.

hohoyaa 2011. 2. 21. 01:04

언젠가 아빠의 휴대폰을 갖고 만지작거리던 딸아이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엄마, 엄마. 혹시 이거 알고 계세요?"

"뭔데?"

"아니 어떻게 엄마가 9번째야? 아내는 당연히 1번 아니야?"

옆방에서 놀던 상혁이까지 쪼르르르 달려와서는 아는 체를 한다.

"어? 엄마가 당연히 1번이어야 되는거 아냐? 나는 엄마가 1번인데."

"야,유상혁. 너는 가만히 있어.아니 어떻게 엄마가 9번일 수 있는거에요? "

"으응응...나도 알아......."

물론 나도 우연찮게 남편의 휴대폰을 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처음엔 좀 서운했지만 다시 고쳐 생각하니 그리 서운케만 여길 일도 아닌 것 같아 모른척 지나쳤는데 딸아이의 매서운 눈에 딱 걸린 것이다.

"와, 아빠는 목포의 할머니,할아버지가 1번이네.그리고 큰아빠랑 고모들.그리고 엄마야.

엄마는? 엄마는 아빠를 몇번에 저장시켰어요?"

"그야 1번이지."

"그치?그치? 엄마는 아빠를 1번에 배정했는데 아빠는 엄마를 2번도 아니고 9번이라니.......

  엄마는 기분나쁘지 않아요? 이건 당장 따져야 돼." 하더니 휴대폰을 갖고 아빠한테로 갈 태세다.

"하나야, 갈 필요 없어. 네 휴대폰에는 엄마가 몇 번이야?"

"그야 당연히 1번이지.그리고 상혁이도 엄마가 1번이라잖아.그런데 어떻게 아빠만 9번에 해놓은 거야?"

"너희는 왜 엄마를 1번에 했어?"

"그야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는 소중하니까."

"그래, 아빠도 아빠의 부모님을 사랑하니까 1번에 놓았을거야.

 그런데 엄마가 아빠를 1번에 둔 이유는 좀 달라. 만약 엄마한테 일이 생기면 젤먼저 아빠한테 연락이

 가라고  1번에 둔거야. 그러니까 됐어."

"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는 샘도 안나요?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1번이면 적어도 엄마가 2번이 되어야하는 것 아니냐고요.어떻게 우리 엄마가 큰아빠들,고모들보다도 중요하지 않은거냐고."

결국 아이들은 아빠한테 그 일을 따져 물었고 남편은 머쓱하니 아무말도 못했다.

그래도 즉시 단축번호를 바꾸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더한 원성을 들어야 했다.

 

며칠 전,일본 NHK 다큐팀에서 남편에게 인터뷰요청이 왔다.

몇년전 함께 작업을 했던 재일교포출신의 연출자인 츠카 코헤이가 작년에 유명을 달리했기에 그 분의 다큐를 찍으면서 한국에서 함께 공연했던 배우들과 인터뷰를 하고싶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공연을 했고 일본까지 가서도 공연을 했지만 사실 끝이 그리 개운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개인적인 기억이 별로 없어서 인터뷰를 사양했으나 극구 요청하는 바람에 OK를 했단다.

지난 주,스케쥴에 맞춰 다큐팀이 한국에 왔다.

인터뷰가 끝나고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길래 인터뷰를 잘 했느냐고 물으면서

마침 공연을 보러 갔던 내가 로비에서 연출자를 만나 인사를 했던 일,그래서 그 날 남편의 대사가 갑자기 바뀌어서 아내가 공연을 보러왔다는 대사가 들어가 내가 감격했던 일도 이야기했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날더러 언제 그 연출자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되묻는다.ㅠㅠ

어머~ 어머....... 이 사람.

그 날 갑자기, 오로지 나를 위해 대사도 바꾸고 회식자리에서는 그 연출자의 옆에 동석도 했었건만 어떻게 그런 것을 까마득하게 잊을 수 있는지.

남편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이야기해주지 할 이야기가 없어서 다큐팀에게 미안하더라고 했다.

재일동포로서, 더구나 일본문화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이에게 그런 인간적인 에피소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은 소재가 되었을까 생각하니 애석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어떻게 그런걸 잊을 수가 있지? 되뇌이는 내게 딸아이가 한마디 한다.

"그러니까 그 날이 엄마한테는 커다란 감동이었는데 아빠한테는 그저 그런 하루였다는 말씀이시네요."

"ㅠㅠ.......아하~! 그러게. 그러니까  엄마한테는 여전히 아빠가 1번이고 엄마는 아빠한테 영원한 9번인가 봐."

 

큰시누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8번으로 승격되었다고 하지만 내가 지우지 못한 큰시누님의 전화번호를 남편인들 지웠을까?

딸아이는 아빠에게 복수할 겸 엄마도 아빠를 꼴찌에 두라고 하지만 내 휴대폰에는 여전히 남편이 1번이다.

그런 엄마를 애석해하는 딸아이에게 그랬다.

이 엄마가 이래보여도 아빠에게는 아직도 숙영낭자라고.

 

남편의 인터넷뱅킹 조회표이다.

"얘들아, 보이지? 숙영낭자. 이 엄마가 그렇게까지 불쌍하게 살고있지는 않단다.ㅎㅎ"

 

 관련글;   노래방과 'Candle In The Wind'    http://blog.daum.net/touchbytouch/8929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