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살 만지기(companion )

남편이 울었다.

hohoyaa 2009. 6. 19. 13:24

이년 전 직장암 수술을 받으신 큰 시누님이 많이 편찮으시다.

항암치료를 거부하시고 섭생에 주력해 오셨는데 암세포가 간으로,콩팥으로 전이가 되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겉으로 보기에도 얼굴이 많이 수척해 지셨다.

시누님도 바보처럼 착하게만 살아 오신 분이시다.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밑으로 다섯 동생을 위해 희생도 하셨을 것이다.

남편은 어릴 적 큰누나가 엄마처럼 자기를 챙겨주던 일을 기억하고 늘 되새긴다.

역시나 큰 형수님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고 있고 그런 남편의 마음에 나는 늘 감동하곤 한다.

어머님도 살아 계시지만 막동이인 자신을 거두어 준 큰 형수와 큰 누나는 좀더 특별한 존재인 것 같다.

그런 큰누나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니,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일까.

 

작년에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입덧이 심해서 꼼짝도 못하는 조카는 전화로 전해듣는 엄마의 병세에

눈물부터 쏟는다.

왜 안그럴까...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친정 엄마와의 정이 각별한데 이제 막 엄마가 되려고 하는 조카딸의 마음은 또 얼마나 크게 무너져 내리고 있을까.

입맛을 잃은 시누님, 조심조심 음식을 가려도 탈이 나곤하는 시누님은 언젠가 우리와 함께 갔었던 중국집의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하신다.

정히 드시고 싶으시면 병원 앞에서 사먹자고 했더니 그 때 그 중국집에 가고 싶으시단다.

짜장면 한그릇이라도 그 날처럼 대접받으며 맛있게 먹고 싶다고 하셨다.

평생을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욕심을 차리지 않으시고 남을 위해 살아 오신 시누님께는

우리들에게는 그저 보통 수준이었던 그 중국집에서의 한끼 식사가 두고두고 기억이 나셨던가 보다.

그와 함께 우리 식구들과 함께 했던 다른 집도 이야기 하시면서 그 때가 수술 후로 가장 기분이 좋았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하셨다.

그 때만해도 수술이 잘 되어 암과는 영영 이별일 줄 알았는데.......

암세포 때문에 극한의 절제를 하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드시질 못하니 배부르지 않고 탈나지 않는 추억 속의 음식만 자꾸 드신다.

 

날이 좋아서 병원에 있는 숲으로 산책을 다니신다.

인공항문과 복수를 빼는 호스를 달고 다리가 너무 부어서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어떻게든 걸어 보시려고 병실엔 잘 안누워 계시는 시누님을 숲으러 찾아가 만났다.

날씨는 더워서 땀이 삐질삐질 나지만 나무그늘은 서늘하다.

겨울 잠바를 걸친 채 힘들게 걸으시는 형님께 잠시 벤취에라도 앉으시라고 권했다.

나무로 만든 벤취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통나무 등걸 모양의 차가운 콘크리트 벤취라 형님은 앉았다가 금새 일어나셨다.

뭔가 아래에 깔아 드릴 것은 없을까 살피다가 가방 속에 있는 책을 꺼내서 깔아 드렸더니

형님은 책을 깔고 앉는게 미안한 듯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그 책을 보신다.

나는 그 책의 제목이 마음에 걸려서 제목이 안보이게 놓은 것같은데(몇 주전 일이라 가물가물하다...) 형님이 그 책을 손에 들고 바라 보시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힘드신데 그만 앉으시라고 다시 책을 깔아 드렸다.

한참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일어나는 길에 형님은 다시 그 책을 들고 표지를 손바닥으로 자꾸 쓰다듬으셨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형님도 가장 예뻤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느끼기에 가장 찬란한 시절이었다고, 빛나는 얼굴로 세월에 마주서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한층 쇠약해진 손으로 자꾸 이리저리 쓸어보던 것은 저 여자의 발그레한 볼이었을까?

하필 왜 저 책을 들고 갔더란 말인가!

 

처음 병원에 갔다 온 날. 남편은 울었다.

내가 이불밑으로 들어가면 늘 따뜻한 남편의 팔베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날은 옆에 누운 남편이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런 남편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나는 숨쉬기도 미안스러웠다.

조용하던 남편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지고 남편의 넓은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어둠속에서도 느껴졌다.

용기를 내어 팔을 뻗어 커다란 남편을 안아 주었다.

흐엉엉 흐엉엉.. 억눌린 울음보가 물꼬를 튼다.

그렇게 부둥켜 안고 나도 따라 울었다.

숨죽여 울던 남편은 내가 신경쓰이는지 거실로 나가 한참을 울고 왔다.

 

당시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은 가고 감정도 점차 안정이 되고 시누님이 요양병원에서 이 병원으로 옮겨 오신지 2주가 넘었다.

이제는 그래도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가느다란 한줄기 빛을 기다린다.

지난 주 일요일에는 하나가 고모 옆에서 공부를 하겠다며 집으로 오는 나를 따라 나서지 않더니 아빠가 오시는 밤시간까지 수학 문제를 풀면서 부은 다리를 주물러 드렸단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고 부러워 할 정도로 고모에게 잘하니 살가운 조카덕에 아마 잠시나마 고통을 잊으셨을게다.

화요일에는 시부모님이 올라오셔서 병원에 들러 우리 집에 오셨다.

걱정했었는데 어머님은 의연히 내색을 안하셨고 오히려 아버님의 안색이 안좋았다.

아버님은 다리가 안좋으신지 지난 번에 뵈었을 때보다도 많이 안좋아 보이셨다.

아버님은 혈압약에서부터 시작해서 간장약,다리가 많이 부어서 드신다는 약에 이르기까지,

어머님도 혈압약에서부터 아픈 허리때문에 드시는 진통제와 소화제에 이르기까지 약만 한보따리이다.

두 분이 내려가시는 날, 다시 병원에 들르지는 못하고 통화를 하셨는데 어머님은 용케 울지 않으셨다.

 

그런 때가 있었지.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있었지.

또한 내가 가장 힘들고 외로운 때가 있었지.

병마와 싸우느라, 죽음보다 더한 절망과 싸우느라 기력이 다하던 때가 있었지.

그 시간을 이겨내고 보니, 그 긴 터널을 지나고 보니 이렇게 황홀한 빛이 있는걸.

 

시누님이 잔잔한 미소로 그런 말을 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기록을 남기는 마음으로 썼다.

날짜도 시간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