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40년 전 성적표로 만나는 선생님들

hohoyaa 2009. 5. 9. 16:39

올해 들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블로그 포스팅 제목이나 내용은 '40년 전...'이다.

아마도 블로그를 하시는 분들중 3040세대가 꽤 많은지.

해서 나도 우연히 넘긴 옛날 앨범에서 발견한 성적표를 보고 이 글을 쓰기로 한다.

'40년 전 성적표에서 만나는 선생님들.' 

 

이 성적표중 한개를 집어 든 우리 딸이 낄낄거린다.

"엄마, 세상에~.  어떻게 국어가 미야?"

성적엔 그리 예민하지 않았는데 순간 눈꼬리가 올라갔다.

"야, 너희들은 올수받았을 것 같아? 요즘엔 수우미양가가 없으니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

우리는 1학년에 입학해서야 겨우 바둑아  이리 와. 철수야 놀자.이런거 배웠어.

너희처럼 부모가 한글 가르쳐줘서 재미있는 동화책 실컷 읽고 학교가는거, 꿈도 못꿨어."

"아!! 이런 순간에도 빛나는 엄마의 개그 본능. 정말 못말려. ^^;"

하면서도 성적표보고 웃어서 미안하다고 얼른 사과를 한다.

"그래...,니들이 뭘알겠니? 너희가 가슴팍의 손수건으로 코를 닦아봤겠니?

우리처럼 물려받은 헌교과서로 공부를 해봤겠니? 너희들 콘센트 막사라고 들어는 봤니? 모른다고?

그렇지.너희같이 풍족한 세대는 모르는게 당연해.

너희 둘, 겨울에는 난로가 있어도 때지 못하고 여름에는 선풍기도 없던 그 시절 엄마 이야기 좀 들어볼래?"

 

 

 

딱 40년 전 1969년에 난 초등학교-아직도 국민학교가 익숙하지만- 1학년에 입학했다.

넓다랗고 황량한 운동장의 미군이 버리고 간 - 마치 깡통을 반 갈라 엎어놓은 것 같은 - 콘센트 막사가

나의 첫번째 교실이었다.

막사의 문을 열면 앞으로 쭉 뻗은 나무복도가 있고 그 옆으로 교실들이 나란히 있었다.

우리 반에는 아이들이 100명도 넘게 있어서 늘 왁자지껄하고 선생님의 얼굴은 기억도 안 나고 그저 교실이 굉장히 더웠다는 기억뿐이다.

나보다 학년이 높은 오빠는 제대로 지은 건물에서 공부를 했기에 나는 또 그게 무척 부러웠다.

 

 

<1학년> 

 

 이 성적표의 '미'를 보고 하나가 그렇게 웃었던거다.

1학기에는 주로 전반적인 학교생활에 대한 훈련과 읽기 연습이 있었는지 성적표가 공란이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이라그런가 성적표도 아주 얇은 종이,뒤가 비칠 정도이다.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성적표를 간직하고 있었던 이유는 선생님의 평가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년동안 나는 선생님의 평가를 읽고 싶어서 방학을 기다렸었다.

100명이넘는 학생들 가운데 선생님이 나를 찬찬히 눈여겨 보시고 명랑하지 못하다고 우려스런 코멘트를

남겨 주시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명랑하고 싶었으나 100명이 넘는 아이들 속에서 그 명랑을 나타내려면 앞에서 설쳐야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난 그저 말이 없는 아이였으니....

 

 

 

<2학년>

 

 2학년 중간에 이사를 하고 전학을 해서인지 아니면 공부를 못해서인지 1학기 성적은 모두 아름다울 '미'

 

 

 

 이 때에도 역시 말수가 적다고 하셨다.

친구와 수다떨기에 서툰 나,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

 

 

 

 친구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나는 외로운 왕따였을까?

특별히 생각나는 친구도 없는 걸 보니 홀로 놀았나 보다.

아마도 이런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엄마는 선생님을 만나러 오셨고 

그 시간동안 나는 조마조마하며 복도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신 엄마는 우리 교실이 있는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으시더니

어느 벽 아이들의 솜씨자랑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다.

그리고 한참을 서있다가 내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훗 날 엄마는 하나가 글쓰기에서 상을 타오거나 하면 그 날의 일을 떠올리셨다.

그 날 엄마가 선생님을 만나 뵈니 선생님께서는

'어머니, 집에만 계시지 않고 바깥활동을 하시나 보지요?

숙영이가 글짓기를 했는데 글짓기안에 그런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복도에 나와 선생님이 벽에 전시해 놓았다는 나의 글짓기를 찾아 보셨던거다.

"그게 필통속에 사는 지우개랑 연필가족의 이야기였는데...

거기에서 엄마 연필이 뭐 어떻게 했다고 그랬는데...

 여하튼 네가 글을 잘썼었지.

아유~! 생각이 안나니 아쉽다. 그 원고지를 간직해 놓았어야 했는데."

엄마는 그 날 처음 내가 글짓기를 잘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어떻게 학교 선생님들은

글만 보고도 아이의 환경을 읽고 엄마가 바쁘게 나다니는 줄을 아시는지 내내 신기하게 생각하셨댔다.

 

 

 

 나를 비웃었던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봐봐,엄마도 상탔다규~.

무슨 상인데 과목도 없냐는 아이들에게 평균이 100점이라고 뻥을 좀 쳤다. ㅎㅎㅎㅎ

노력상은 80점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노력을 더하라는 것인지 노력을 할만큼 해서 상을 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상장은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얇은 종이이다.

 

 

<3학년>

 

 이사한 동네에 드디어 초등학교가 세워지고 문을 열게 되어 다시 집 근처로 전학을 했다.

이렇게 공란으로 남는 성적표를 보면서 전학교에서 1학기를 마치고 올걸 그랬나하고 섭섭하게도 생각했었지.

 

 

 

 이 선생님은 비교적 또렷이 기억이 난다.

상당히 깐깐하고 무서운 여자 선생님이셨다. 글씨만큼이나.

 

 

 

 그런 선생님이 나에게 영리하고 깜찍한 귀여운 어린이라 하셨으니,

앞으로 싹수가 보인다고 하셨으니 저 성적표를 받아들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하늘을 날았겠지.

 

 

<4학년> 

 

 내가 갑자기 명랑해졌다.

그리고 생각나는 친구들도 많이 있다.

 

 

 

 이 시절에는 '자유교양대회'가 있었다.

문교부에서 지정한 책들을 읽고 전국대회에서 시험을 보는 것이었는데 내가 학교 대표에 뽑혀서

날마다 방과후에 책을 읽고 예비시험을 봤던 기억이 난다.

백사 이항복,오성과 한음,풀타크 영웅전,그리스 신화, 사랑의 학교같은 그런 류의 책들인데 대표로 뽑힌 아이들이 각기 책을 몇권씩 맡아 책을 읽고 그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면 그걸 토대로 시험을 보며 '자유교양대회'에 대비했었다. 책을 돌려 읽을 시간도 부족해서 선생님의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하셨던 것 같다.

요즘같으면 아이가 학교 대표로 저런 대회에 나간다 하면 아마 그 책들을 모두 사서 안겨 줄 것이나 당시에는 교과서 이외 교양(?)서적에 돈을 들일 정도로 넉넉한 가정이 많지 않았다.

그 대회를 염두에 두고 쓰신 선생님의 '고전 읽기'권유로 우리 집에는 월부책이 책꽂이에 놓이기 시작했다.

 

 

 

 ㅎㅎ 하지만 정작 상은 미술로 받았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슬로건보다는'쥐잡는 날'과'불조심 강조 기간'이 더 익숙한 세대였다.

아마 그래서 불자동차 그리기 대회를 열었나 본데 우리 학교도 아닌 다른 학교로 선생님과 함께 가서

운동장 가운데 서있는 불자동차를 크레파스로 그리는 것이었다.

미술학원이라고는 동네에 하나 있을까말까하고 그나마도 정말 그림을 잘그리는 어른들만 다니는 줄 알았기에 우리 세대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다듬어지지 않은 그림을 그렸었다.

어떻게 해서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늘 흐지부지 용두사미.

노랑색 크레파스로 밑그림을 그리느라 오전시간을 다 보내고 지쳐서 손을 놓고 있으니

심사위원이신듯한 분이 지나다가 내 그림을 보시고는

'너무 지나치게, 자세히 그리는구나.'하셨다.

'너무'란 말이 들어가 있으니 그리 좋은 말로는 들리지 않아 갑자기 맥이 풀리고 어차피 해도 안되는 것,

그림을 완성하고 싶지 않았다. 밑그림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버렸다.

그래서 끝내 완성을 하지 못한 그림을 내고 왔는데 몇 개월 후 교장실 호출을 받고 가서 이 상장을 받아왔다.

부상으로는 24가지색 크레파스였었는데 그걸 받고 또 얼마나 실망을 했던지.

적어도 36색은 되었어야지.

저런 대회에 나가 상을 타도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나도 곧 잊어버리고다만 학교에서 소년한국일보를 받아볼 때면 나에게 크레파스를 사준 고마운 신문이라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말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던 내게 이 학교에서의 3년은 축복과도 같았다.

조용하고 나서지 않는 아이에게 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맨오른쪽 상에는 '만들기'를 잘해서 상을 준다고 적혀있다. 지금의 내 블로그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지는 듯.

웅변대회에서는 내가 웅변보다도 원고 내용이 좋아서 상을 준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숫기없고 목소리 작은 딸이 웅변대회를 나간 것만도 신기한데 6학년 남학생에 이어 

4학년인 내가 2등을 했다고 부모님께서는 상당히 기뻐하셨었다.

 

 

 

<5학년>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했던가. 쑥스...6^^;

조용했지만 내면엔 욕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성격이 바뀐 것인지 선생님의 눈에도

 이젠 제법 적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는가 보다.

초등학교 시절,나의 꿈은 오락부장이었고 아이들이 추천을 안해줘서 직접 나서지는 못하고 안절부절했었는데 지금 이 통지표들 속 내모습을 보니 언감생심 말도 안되는 야무진 꿈이었던게다.

대신 처음으로 여자 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것도 선생님의 열린 생각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음을 이제서야 알겠다.

 

 

 

 

 이 때부터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특기교육을 권장하는 시기였던 듯하다.

뭔가 한가질 해야하니까 조회 시간에 애국가를 연주하고 싶어서 피리를 선택해 합주부에도 들었다.

멜로디카나 다른 악기는 비싸니까 음악시간에 사용한 피리를 그대로 들고 간 것이었다.

피아노도 칠 줄 몰랐던 난 날마다 빈교실에서 합주부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 않았던 나는 검은색 부루머를 입고 피구도,핸드볼도 열심히 했었다.

구내 학교 대항에도 나갔었는데 그 때에도 호랑이 체육 선생님이 대표로 뽑아주시며 한 말씀 하셨었다.

공을 잘 다루지는 못해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니 뽑아 준다고 하셨다.

재능보다도 성실함이 어른들께 더 많은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6학년>

 

 

 

6학년이 되어서는 중학교 배정때문에 신촌으로 전학을 하고 남아있는 것은 이것 한 장이다.

졸업식 날 왜 성적표를 안 주시는지 여쭈어 봤더니 성적표가 중학교로 직접 가기 때문에

나눠주지 않는다 하셨고 반학기를 남기고 전학을 왔던 나는 반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는 많이 받았으나 정작 선생님의 나에 대한 평가를 알 기회가 없어 못내 서운했다.

 

 

물론 선생님들의 코멘트가 100% 다 진심일 수는 없겠지만 이제 마악 자의식이 형성되는 시기에 선생님들의 관심어린 충고와 칭찬은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 나의 어린 시절 통지표를 보며 생각해 보았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며 평범한, 너무도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았던 아이는 선생님께 직접 들은 칭찬은 기억나지 않아도 이렇게 통지표로 건네들은 한마디에는 어깨가 으쓱했던 것이다.

 

 

<중학교>
중학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학생을 평가한다.

수우미양가와 학생 개개인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어린 평가는 이제 숫자로 그 칸을 대신한다.

배정된 중학교가 종로에 있었기에 날마다 종로 학원가를 가로질러 등교를 하다보면 웃음기없이 풀죽어 학원으로 향하는 재수생과 학원 문앞에서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을 보며 공부란게, 산다는게 참 힘든 것이로구나 간접적으로 느끼기도 했다.

아침녘의 그 학원가는 오후시간이면 활기가 돌았다.

우리가 아는 학원은 재수생들이 다니는 곳으로 재학생을 위한 보습학원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의 중학교 시절은 친구들과 어울려 얼굴가득 햇살을 받으며 까르르 웃거나 종로에 있는 화랑 구경을 하는 일,그리고 오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150원짜리 삼중당 문고판이 300원으로 오르기까지 열심히 사서 돌려읽고 책꽂이에 꽂아 놓고 부자가 된 듯 흐뭇해하는 사춘기였다.

 

그래, 초등학교 입학하고 한글을 배웠듯이 우리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알파벳을 배웠다.

겨울 방학동안 오빠에게서 알파벳을 배운 나는 영어시간에 숙제로 내준 알파벳 연습 노트에 필기체로 abcd~를 써갔다가 영어 선생님께 혼쭐이 났다.

인쇄체도 아직 다 안배웠는데 건방지게 필기체로 써왔다고...

오빠가 공부를 잘했고 늘 오빠처럼 되기를 꿈꾸었던 나는 오빠만큼 잘해 보려고 했다가 충격을 받아

영어는 좋아도 영어시간이면 늘 가슴이 조마조마했었다.

할머니선생님이었던 영어선생님은 수업시간 내내 나를 감시하는 듯 눈초리가 서늘했고 나는 선생님 얼굴대신 멍하니 칠판만 보며 숨도 제대로 못쉬고 수업을 받았다.

그래도 시험 공부는 했는지 외국어 점수는 비교적 잘 나온것이 보인다.

할머니 선생님께서는 일학년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2학년 올라가서도 열심히 하라고

해주셨고 일년간의 서운함은 그 한마디로 눈녹듯 스러져갔었다.

저 때에도 학생수가 많았구나. 콩나물 시루같은 학급이라 했었고 내성적인 나는 당연히 일년내내

말도 못 건네 본 아이들이 있었다.

 

 

숫자로는 평가를 했지만 담임 선생님의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

이젠 누군가가 내게 따뜻한 말로 격려를 해주는 대신 스스로 알아서 커나가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이 너무도 빠듯하여 부업을 하셨던 우리 엄마는 삼남매에게 관심은 있었어도 학교에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으셨다.

우리 때에도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있었고 어린 우리들의 눈에도 그런 엄마들 둔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로 인해 우리같은 아이들이 불이익을 받은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우리가 차별받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거나 아니면 어른들의 생각처럼 선생님들의 차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믿음이 있기에 나 역시도 아이들 학교에 인사가는 일은 극도로 피하게 된다.

내가 굳이 간섭을 하거나 잘 봐달라고 인사를 하지 않아도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세월의 변화가 없다고 믿고싶다.

중학교에 올라 와 영어를 처음 접하고 인쇄체를 이제 막 배우는 학생을 배려한 영어 선생님의 마음이 내게는 아픔으로 다가왔으나 다른 학생들에게는 따뜻한 할머니선생님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해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선생님이 또 한 분 계시다. 

그 분은 나의 선생님도 아니었고 세살 터울 남동생의 1학년 담임이셨는데 성함 세글자를 또렷이 기억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은 어쩐 일인지 학교가는것이 즐겁지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동생은 나처럼 말수 없고 친구가 없어 학교가 싫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삼남매 모두 학교에 보내고 엄마가 쓰레기를 버리러 대문을 나섰다가 깜짝 놀라셨단다.

학교에 있어야 할 동생이 쓰레기통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선생님도 그런 동생의 상태를 알게 되고 그 후부터 선생님께서는 아침에 학교가시는 길을 멀리 돌아 우리 집앞에서 동생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셨다.

결혼을 하셨고 후덕한 이미지의  김정희 선생님,  내가 만난 선생님들도 좋은 분들이셨지만 동생을 내치지 않고 함께 걸어 가 주신 그 선생님을 해마다 5월이면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