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할인 영화 '더 리더'
20대의 어느 봄날.
책상 앞에서 집중해서 연필을 놀리다가 허리라도 필겸 커피 한잔을 빼들고 회사 앞마당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는 시간인가, 온 세상이 초록위에 주황색을 띄는 초록을 또 덧칠한 듯 처음 보는 생경한 느낌.
어쩌면 영화 속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색을 입힌듯한 그런 풍경.
오히려 봄이라기보다는 가을이면 그 깊은 색이 더 어울릴 듯한 그런 오후의 빛을 보았다.
옆의 동료에게 저런 초록빛은 처음 본다고 나의 느낌을 같이 나누고 싶었으나 자기의 눈엔 그저 평범한 초록일 뿐이란다.
다음 날에는 머리가 너무 아팠다.
날이 흐린지 아침부터 컴컴하게 내려앉은 날씨는 오후가 되어도 여전히 무겁게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데 남들은 날씨가 좋다고 마음이 들떠 이른 퇴근을 서두르고 있다.
아~! 어제의 그 깊고 오묘한 초록이 오늘은 주변의 사물들에게 녹이 묻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아무도 나의 그 느낌을 공유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들을 아무도 보지 못한다.
편두통이 한층 더 심해졌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며칠 전 종로에 나가 렌즈를 맞춘 것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렌즈를 바꾼 후 세상이 온통 초록색이라고 했더니 칼라렌즈더라도 그렇게 세상이 초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또 다시 곰곰 생각을 해 본다.
안과에서 권한-난생 처음 먹어 본 박카스가 생각이 났다.
이번엔 그 제약회사에 전화를 건다.
이제껏 박카스를 먹고 그런 부작용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아침이 되었는가 싶은데 날이 밝지 않았다.
몇 번씩 눈을 감았다 떠도 칠흑같은 어둠은 시간의 흐름마저 빼앗아 사물의 그림자조차 보여주질 않는다.
내 관자놀이의 어느 신경 한가닥을 가느다란 명주실로 묶어 톡.톡.톡.톡... 누군가가 계속 주기적으로 당기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엄마는 날이 이렇게 밝았는데도 안 일어나느냐고 들어오셨다.
“엄마, 아직 새벽 아니에요?”
엄마는 해가 중천에 있는데 어쩐 일로 아직까지 누워있느냐고 많이 아프냐고 하셨다.
나는 내 손을 들어 다시 내 눈앞에서 흔들어 본다.
보이질 않는다.
엄마, 지금 엄마도 안 보이고 내 손도 안보이고 온통 깜깜해.
앞을 보지 못해서 엄마의 팔에 의지해 병원을 찾아 다녔다.
안양의 종합병원에서도 손을 쓰지 못해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에 서울로 갈 생각을 했는데 엄마는 당신이 처녀 적에 몸담았던 수원의 카톨릭병원 약이 서독산이라 좋다며 수원으로 가자고 하셨다.
다 큰 딸은 엄마의 팔에 이끌려 버스를 타고 빈자리는 당연히 젊은 내가 차지하고 버스안을 떠도는 황사의 매캐한 공기를 마시며 병원엘 갔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중심성망막증이며 망막이 부어서 수정체 안의 액이 밖으로 흘러나와 세상이 그렇게 초록으로 보인 것이라고 했다.
레이져로 지지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이미 부어버린 망막을 되돌리는 방법으로는 시간을 두고 약물치료하는 방법이 좋겠다고 한다.
앞으로 3개월 정도 가만히 누워 액이 다시 안으로 스며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이미 앞이 안보이면 상당히 진척된 것으로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실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내 손을 거들고 나의 눈이 되어 병원에 다니던 엄마는 내가 시집을 안가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늘 정확한 시간에 내 앞으로 약을 내주셨다.
오빠나 동생은 말은 안하지만 내 방에 얼굴을 들이 밀어 보아도 시선을 맞출 수 없는 나를 보며 한숨이 깊었을 것이다.
나는 볼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눈물을 보이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사실만큼 사셨다고 내게 안구를 주시겠다고 하셨고 할아버지는 내가 밤샘을 하면서 안력을 너무 써서 이런 일이 생겼다며 탄식을 하셨다.
막상 눈이 안보여도 나는 내가 실명을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물이나 회한도 없었다.
만약 눈이 안보이면 제일 먼저 점자를 배워야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당시 만나다가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다가 헤어지고 하던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책을 읽어주는 남자였다.
목소리가 좋았던 그는 군을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해 책을 읽어 녹음하는 봉사를 하고 있었고 복학을 하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안다.
차분하고 진지하고 성실했던 그 사람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져 몇 번을 밀쳐내었는데도 다시 돌아와 내 곁에서 기다려 준 사람이었다.
그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솔직했으나 나는 내 감정을 바로 보는 것에는 서툴렀던 20대 였다.
수년을 만나 왔으나 결혼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친구를 통해 내 소식을 들은 그 사람은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실명을 하더라도 결혼을 할수 있다고 해서 그야말로 실소를 했다.
내게는 이제 결혼도 어둠 속에 묻혔다.
오로지 이제껏 내가 보았던 기억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가야 할 터이니 날마다 내가 보았던 색깔들이며 사물들의 형체를 머릿속에 각인시키고자 노력했다.
앞이 안 보이니 내가 깨어 있을 때와 꿈을 꾸는 것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늘 엄마나 할머니를 찾아 그 구분을 하곤 했다.
엄마는 꿈을 꾸셨다.
물이 맑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던 어린 내가 갑자기 엄마를 쳐다 보며 씨익 웃는데 내 입안에 나뭇가지같은 것이 들어가 있더란다.
엄마는 답답하겠다 싶어서 그 나뭇가지를 꺼내 주셨단다.
계절도 보지 못하고 병원을 오가는 길에 어슴푸레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혹시하는 희망에 놀랐으나 되려 실망하게 될까 두려워 엄마에게는 말도 못하고 혼자 가슴이 뛰도록 그 그림자가 다시 오기를 며칠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안양에서 수원을 가는 길 먼 산에 진달래가 보이는 듯싶었다.
길가에는 노란 개나리가 피었겠지 하다가 어느 상점 간판을 읽어 본다.
상상이었던가, 오래 된 기억이었던가.......
“엄마, 저기 00슈퍼라고 씌어 있어요?”
“응? 어디...그래, 그래. 맞다. 맞다. 그 옆에도 읽을 수 있니?”
“길 옆에 자전거도 있고 사람들도 지나가네.”
처음엔 어렴풋한 기억의 잔상정도로 이해되던 사물들은 날이 갈수록 그 빛을 되찾아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한글을 깨친 듯 길가의 모든 간판을 읽으며 좋아하는 우리 모녀를 호기심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버스 안의 승객들도 보였다.
병은 나았지만 내 망막은 그 표면이 매끈하지가 못하다고 한다.
다시 재발 할 수도 있으니 과로하지 말고 스트레스도 받지 말라했다.
내 성격도 그로 인해 많이 변한 것 같다.
눈이 안 보이는 그 몇 개월을 머리가 아프다고 짜증속에 보냈던 나였기에 병은 나았으나 그만 짜증이 몸에 배고 말았다.
안경대신 렌즈를 끼고 다녔던 나는 그 일 이후로 다시 안경만을 쓴다.
속쌍거풀에다가 속눈썹이 길어 눈을 자꾸 찔러대는 것도 약시의 원인이 되고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해서 그 때 쌍꺼풀을 했다.
회사 선배가 쌍거풀을 한 뒤로 내 특유의 영특함이 사라져서 아쉽다고 했는데 난 그 말이
내 눈에 초점이 없다는 말인 줄 알고 가슴이 덜컥했던 기억도 있다.
누가 나의 상꺼풀에 대해 궁금해 하더라도 아무 말 안한다.
이쁘게 보이기 위해 한 것이 아니라는 변명도 하기 싫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눈이 다시 안 보이게 될 확률이 커질까 봐 두려웠었고 그 말을 가벼이 해버리면 오히려 주문이 풀릴까 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밤이 새도록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던 생활은 그 이후로 그만 두었다.
잠이 오지 않아도 12시가 넘으면 자려고 노력했고 매사에 포기도 빨라지고 욕심도 사라져갔다.
눈이 다시 보이면 남을 위해 봉사를 하겠다는 맹서도 했었다.
그 안에는 나도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되리라는 계획도 들어 있었다.
아마 그 때 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 가능한 맹서였겠지만 무언가 운명적인 것이 느껴지는 그 사람과는 종내 이별을 했다.
내 운명을 거스르고 싶은 치기가 있었다. 20대에는.
4월 2일, 남편과 ‘더 리더’를 조조로 보고 왔다.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해서 찜찜했으나 영화를 먼저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이후 현대 독일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는 평을 보았기에 영화 속에서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미하엘의 언어가 독어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하며 보았다.
영화를 보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감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센치해진 감정을 조심스레 간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무리의 아줌마들-그래도 나보다는 젊은 엄마들이다.-이 급하게 따라 타며 한마디씩 한다.
“난 처음에 막 화가 나더라. 우리 아들이 올해 15살이잖아.”
나와는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다.
영화를 보면서 책을 읽어주는 봉사를 하던 사람을 떠 올리고 어쩌면 그 봉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나의 20대를 떠올린 나는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을 영화에 대입하는 엄마에 비해 상당히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좋았다.
원작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였으나 느낌은 잘 살렸고 이제는 책을 읽으며 즐기던 내 상상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실감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