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feeling)

오지 체험 24시

hohoyaa 2006. 4. 10. 23:07

2006.02.10

 

 

오지라 하기엔 좀 무리다 싶기도 하지만 요즘같은 대명 천지에 우리 식구들이 겪은 일이니 감히 그렇게 이름 붙여 봅니다.  *^^*

 

엊그제,오후 6시 정도에 갑자기 전기가 나가더니 다시 들어 올 생각을 안 하더이다.

처음엔 아무리 길어야 1~2시간 후면 복구 되겠지 싶어서 집안에 있는 양초란 양초는 다 켜 놓고 아그들과 모처럼만에 단란한 시간도 갖고,,,,

 

"엄마 어릴 적에는 이렇게 전기 나가고 물 안 나오는 때가 다 반사였단다."

"아하~! 그래서 엄마가 이런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양초를 켰네???  그런데 물이 안 나오면 어떻게 했어요?"

"엄마가 어릴적에도 아파트에 살았었는데,아파트 안으로 소방차가 들어 오면 사람들이 모두 물 받을 양동이나 큰 함지박같은것을 들고 나와 줄을 서서 물을 받아 갔었지.

근데,소방 호스로 주는 물이라 강약 조절이 안 되어서 바닥에 버려지는 물이 더 많았던것 같애.

엄마도 물 받는게 재미 있어서 줄에 서 있다가  엄마 차례가 되기 전에 물이 떨어지면 괜히 바닥에 흘린 물이 아까워서  발을 동동 굴렀었지..."

"흠! 가만히 듣고 보니 외삼촌 둘은 아니고 울 엄마만 물을 받는 노동을 했다는 말씀?! "

"아니, 아~니. 물론 같이 줄 서고 있었지..그리고 재미 있었다니까??"

하나가 벌써 매사에 남녀 차별을 대입하는 나이가 되었나?

어둠에 관한 우스운 얘기도 하고,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도 끝말잇기로 목소리를  내다보니 아이들이 무척이나 재미있어 하는것 같다.

엄마랑 이렇게 얘기하고 노는것이 너무 좋다며 정전이 꼭 나쁘고 불편하지만은 않다는 하나의 일침에 뜨끔!

종국에는 들어 오지 않는 전기를 기다리다가 식탁에 촛불을 밝히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마침 밥은 해 놓은것이 있는데,문제는 가스 오븐렌지였다.

건전지로 점화가 되는 줄 알았는데 우리것은 전기로 하는것이었던것.

"성냥은 이럴 때 쓰는거야~"

생일 케잌에 묻어 오는 성냥을 모아 두었길래 다행이지,애들 앞에서 무슨 굉장한 마술이라도 하는 양 가스에 불을 붙여서 약식으로 저녁 상을 보았다.

 

 

 

자,먹자.

우리 어릴 때 촛불은 상당히 밝은 빛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것은 별로 밝지 않아 어슴푸레하니 영낙 없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식탁의 모습이다.

"엄마!" 갑자기 생각난 듯 상혁이가 한 마디

"엄마! 꼭 프랑스 식당같애! 이렇게 촛불이 있으니까 너무 멋져~~"

하나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남자 아이가 너무 낭만적이지 싶다.  *^^*

 

처음 한두시간은 재미로 견뎠는데 방송으로 오늘 밤엔 아무래도 힘들겠다며 추위에 대비를 하란다.

창밖을 보니 차량들이 아파트를 속속 빠져 나가고,눈도 내리고, 실내 기온도 계속 내려가고...

하나 아빠가 차를 갖고 나갔으니 우리는 저 피난 행렬에 낄 수도 없고...

뒤늦게 아주 원시적인 유선 전화만 되고,인터폰 겸용 전화,무선 전화,팩스 전화등 전기가 들어간 모든 전화는 불통이란것도 알았다.

 

일단 다음 날 학교도 가야하고 유치원도 가야 하니 괜히 자리를 옮기는것 보단 그냥 집에서 밤을 지내기로 하고 애들을 양말까지 신겨서 재우기로 했다.

자는 시간까지 상혁이는 걱정이 많다.

자기 친구 다영이랑 다영이 동생 주영이,그리구 한 살 어린 옆 라인 태희까지 무서워 하면 불쌍해서 어쩌냐고 하더니 아빠는 이따가 16층까지 깜깜한데 어떻게 올라 오느냐며 눈물까지 글썽인다.

"정말..미리 알려 드려야지,깜짝 놀라시겠네? 엄마가 아빠한테 전화 할께 걱정 말고 자~."

 

애들을 재우고 보니 깜깜한 어둠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전기가 끊기니 물도 안 나오고,보일러도 안 되고,라디오 역시 전기가 편하다는 이유로 건전지를 준비해 놓지 않았기에...

세상으로부터 단절 된 공간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자격은 미달이었던 것.

자꾸만 밖으로 밖으로 빠져 나가는 자동차의 행렬이 마치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는 모습같다.

 

다음날 아침엔 물 한 컵으로 양치하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충 씻겨서 애들을 보내고,하나 아빠가 옆 상가로 가서 물을 길어 왔다.

등산 가방에 물병을 담고,양쪽 손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동이 한 개씩.

예민한 상혁이는 전 날 속이 안 좋은데도 화장실 물이 안 나온다는것을 알고는 좀처럼 볼일을 보지 못했으니,당장 급한것이 화장실이었던 것. 

애써 길어온 물도 양 쪽 화장실 수조를 채우고 나니 다시 쓸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늘은 진짜 피난을 가야 하는것인가 고민하던차에 전기가 나간지 24시간 만인 저녁 6시가 넘어 집안이 환해졌다.

제일 먼저 냉동실을 확인하고 녹기 시작한 굴을 꺼내 미역국을 끓이고,설에 빚어서 얼려 놓은 만두를 찜통에 찌고,팬에 굽고,오징어도 칼집내서 얼른 데치고...

상하기 쉬운 음식들을 우선 조리를 하니까 당장 보일러는 가동이 안 되어도 훈훈하고 온기가 도는 것이 마음까지 느긋해 진다.

역시 한국 사람은 뜨끈한 국물이 있어야 ...

 

아파트 배전판이 있는 곳에 물이 차서 사고가 났기 때문에 금방 복구는 안 될것이고 한전에서 차가 두 대나 와서 외부 전력으로 일단 엘리베이터만이라도 가동을 시키겠다고 공사 하던 중에 한전 직원이 감전되어 병원으로 실려가기 까지 했다. 

추운 날씨에 밤샘 작업하는것을 지켜보았기에 그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불평도 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아저씨의 식구들은 또 다른 걱정으로 밤을 새울것이리라.

보일러는 혹시 얼었을까봐 (실제로 5층 이하는 얼었다네요.)직원들이 일일이 가가호호 다니며 안전 진단 후에 가동을 시킨다는 방송도 반갑기 그지없고.

하루로 끝났으니 아이들에게는 추억으로도 남을것이고,앞으로 평생을 살면서 두고 두고 이야기를 하겠지?

마치 나처럼...

 

"엄마,우리는 이렇게 하루를 지내기도 힘든데 파키스탄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엄마보다는 생각이 글로벌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