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머리
우리 동네에 '바람난 머리'라는 미용실이 있다.
처음 이사와서 미용실 순례를 다닐 적에도 간판 명이 마음에 안 들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미용실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거기서 자른 머리가 마음에 들어 이후 단골이 되었다.
나도 가고, 하나도 가고, 상혁이도 가고, 이젠 하나 아빠까지도 고정 고객이 되었으니 아주 엉터리는 아닌게 증명이 된셈이다.
오늘 훈풍을 맞으며 '바람난 머리'로 파마를 하러 갔다.
며칠 전 인터넷 카페 정모를 하고 후기 사진을 보니 머리가 너무 지저분했다.
또 강원도 여행을 떠나 찍은 사진의 머리가 너무 어수선해서 약간만 다듬고자 함이었는데 미용실 의자에 앉자마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은
"좀 산뜻하게 잘라 주세요." 였다.
미용실 언니는 아주 짧게 자르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해 본적이 있느냐고 묻고 약 20여년전 귀까지 파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노라며 뻔뻔스레 자랑까지도 했다.
처녀 시절, 머리는 나름대로 많은 변화를 주어 양배추 머리도 해 봤고,남자처럼 짧게도 깎아봤고,생머리도 해 봤고,길러도 보았었다.
그러나 결혼 후 바쁘단 핑계로 그리고 이제는 세월이 녹녹히 앉아 있는 얼굴형도 예전같지 않아 나이도 속일 수 없으니 늘 머리는 그 스타일이 그 스타일이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가위질 소리가 기분 나쁘지 않게 느껴지고 한결 짧아진 머리를 보는 하나의 입에서
"엄마.마리아 같다.'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그 마리아 같애."
라는 말이 나오니 한결 마음이 놓여 기분좋게 미용실 문을 나섰는데.
집에 돌아오니 남편의 입에서는 대뜸 왜 멀쩡한 머릴 잘라서 선머슴처럼 만들었느냐는 말이 나오고
제 방에서 놀다가 뛰어 나온 상혁이는 엄마가 조혜련 같다고 한다.
내친김에 조카가 만들어 준 귀걸이도 해 보았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엄마,귀걸이 하니까 더 조혜련 같애.'
그래도 그냥 웃으며 흘려 보냈는데 느즈막히 친구들과의 모임에 간다는 남편을 배웅하던 나를 본 상혁이는
'엄마,멀리서 보면 큰외숙모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까 조혜련같애.'로 나를 다시 절망케 한다.
상혁이 눈에는 조혜련이 여자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남편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술이 많이 취해서 왔다.
비틀거리던 남편은 내 머리를 다시 보더니
왜 잘 어울렸던 머리를 그 모양으로 만들었냐?
자기가 나 만났을 적에 이 머리였으면 내가 홀애비로 늙어 죽을지언정 결혼은 안 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지금 이 모습 보셨더라면 자기랑 결혼 하는것 반대 하셨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머리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남편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듣느냐.
지금도 내 주윗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한 번 보면 '형, 정말 결혼 잘 했네.형 인생에서 딱 한가지 잘한게 있으면 바로 결혼이야.어쩜 그렇게 형이랑 반대냐.진짜 형수 잘 얻었어.'한다고 그렇게 얘기해 줬는데 ......
앞으로 당분간 내 주윗사람 만나지 말아라.
여자라면 자기한테 어울리는 머리스타일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내가 보는 눈은 일반적인 남자들 눈이다.
절대 내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자기한텐 나한테 없는 품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아마 낼모레 블로그 친구들을 만나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차마 안 좋단 말은 못하겠지만.
자기 지금 머리는 어떤 아줌마가 달라 보이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단 말이지.
처음 만났을 때 머리가 젤 좋았고 그래도 파마까지는 봐 줬는데 이젠 이 모양을 해 놨으니...
머리를 약간만 다듬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큰 사고를 치고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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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어지던 푸념을 뒤로하고 남편은 코를 골고 잠이들었다.
자려고 누웠던 나는 갑자기 퍼뜩 정신이 나서 혼자 셀카를 찍어 본다.
그렇게 이상해?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머리였었지?
요건 며칠 전.
머리가 너무 길고 정신없다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그립다...ㅠㅠ
안경도 커보이고 정말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넹.
수십장 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이니 실제론 더 황당하겠다. ^^;
울 친정 엄니는 늘 말씀하셨지.
"넌 내가 머리가 한참 좋다고 생각할 때 꼭 머리를 잘라서 이상하게 만들더라."
워쩌~~ 다시 붙일 수도 없고,가발을 쓸 수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