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hoyaa 2007. 9. 27. 17:12

초등학교 2학년 때 살던 곳에서 이사를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성동구 마장동인가 왕십리 정도가 되었던 것 같은데 그 곳에서 1학년을 마치고 영등포구 끝자락의 신흥 개발지 개봉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난생 처음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게 되었었다.

당시엔 전학을 한다는 것이 지금처럼 간단하지가 않아 이사를 한 후에도 서류 정리가 끝날 때까지 전에 다니던 학교를 계속 다녀야만 했었고 성동 구청에 계셨던 아버지 역시 영등포 구청으로 옮겨 앉기 전 한동안은 계속 그 곳으로 출근을 하셔야만 했기에 날마다 새벽밥을 먹고 아버지를 따라 만원 버스엘 올라탔었고 나보다도 아버지가 먼저 발령이 나는 바람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은 나 혼자 다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울 부모님은 속도 편하셨지, 초등학교 2학년짜리 어린 아이를 새벽 버스 그것도 중간에 한번 갈아타고 다니는 근 2시간짜리 통학 길을 열심히도 챙겨 보내셨다.

나 역시도 힘든 줄도 모르고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숨도 못 쉬고 앞도 못 보고 있다가 용케도 버스를 갈아타고 다녔는데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그 버스안에서 ‘광복20년’,‘아차부인 재치부인’,‘김삿갓 북한 방랑기’등의 라디오 드라마를 들어가며 ‘검은 장갑 낀손’이라는 주제가를 들어가며 어느 정도 왔구나 하는 시간과 거리가늠을 했었던 것 같다.

 

어렵사리 전학이 되어 다닌 학교는 그 동네 학교가 아직 문을 안 열어서 버스로 서너 정거장을 가서 내리고 큰길에서도 한참을 들어가 있는 초등학교엘 1년 남짓 다닌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버스비는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고, 입석과 좌석이 생겨 좌석은 20원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정거장도 몇 개 되지 않는 거리를 오른 차비 다 주고 타기가 아까웠는지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면 안내양 언니에게 “10원에 되요?”하고 차비를 깎으면 대부분의 안내양 언니들은 길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를 보고 고향의 동생 생각이 났는지 10원에도 태워주고 공짜로도 태워줬다.

신이 나서 “고맙습니다.”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면 어떤 언니는 “너, 차비 아껴서 까먹으려고 그러지?” 하면서 짐짓 우스갯소리로 놀리기도 했는데 난 용기 있게 아니라는 말을 못했다.

왠지 변명을 하면 더 거짓말같이 느껴질 것 같아서였는데 사실 우스웠던게 우리 집은 서너 정거장만 가서 내리면 되었지만 난 일부러 집에서도 대여섯 정거장을 더 가서 좀 더 번화했던 그 버스의 종점에서 내렸다.

새로 지은 아파트가 있었던 우리 동네에는 은행이나 시장이 아직 들어서지 않았지만 그 종점에는 큰 재래시장과 현대식 슈퍼, 그리고 빵집과 주택은행등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고 차비를 깎아 손에 쥐고 있던 5원이나 10원은 날마다 고스란히 주택은행의 통장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시 샛길로 삼각형의 마지막 꼭짓점에 있는 우리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그 후 차비를 깎는 내 모습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차비를 깎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안내양 언니들도 각박해지고 신설된 동네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집 앞에 국민은행이 생겼는데 차비가 필요 없으니 자연스레 저축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6학년이 되자 울 엄마는 또 다시 나를 전학시키셨다.

중학교 추첨 때문에 공동학군을 가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이번에는 신촌 로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 버스는 한 번에 가는 노선이 있었지만 역시 만만찮은 거리였다.

서울 도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니 입성이 깨끗해야 한다고 양장점에서 흰색 바탕에 주황색 꽃무늬의 원피스와 흰색 상의에 보라색 꽃무늬의 원피스등 몇 벌의 옷을 맞춰 주셨고 새로 맞춘 이쁜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간다는 사실에 또다시 시작되는 장거리 통학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외국에서 귀빈이 올 때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손에 손마다 종이 태극기를 들고 한강을 건너오는 차량 행렬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선생님의 신호에 따라 연도(沿道)에서 무작정 국기를 흔들어 대는 재미는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화려한 스폿 라이트를 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나 ‘제럴드 알 포드’ 대통령 그리고 ‘지미 카터’를 기억하는 이유는 순전히 포드 대통령이 방한(訪韓)했던 그 때 내가 국기를 흔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마치 지금 북한의 아이들처럼.

 

중학교는 엄마의 바람대로 공동학군인 종로구 소재 학교엘 갔고 통학은 버스를 갈아타는게 귀찮아서 학교 뒷길로 나가 경복궁을 지나 세종문화 회관을 거쳐 서소문 동양방송국(TBC) 앞에서 버스를 탔다.

덕수궁을 지나 서소문으로 가는 길목엔 고려당이라는 제과점이 있었다.

마침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를 사귀게 되어 걸어 다니는 길이 즐거웠는데 우리 둘 다 차비를 아끼고 사춘기 소녀의 방랑을 걷는 것으로 맘껏 펼쳐보자는 심산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 추운 겨울에도 마냥 걸었다.

하지만 그 낭만도 더운 여름날에는 맥을 못 추었으니 일껏 걸어온 보람이 고려당 앞에서 무너져 버스 한 번 덜타고 아낀 차비보다도 비싼 고려당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더위를 식히면서 우리는 또 킥킥대고 웃으며 이게 남는 장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걸었고 또 고려당엘 들렀다.

 

 

1974년 8월15일에 개통되어 대중교통의 혁신으로 떠오른 수도권 전철을 이용하면서는 통학 시간이 훨씬 짧아지고 전에 흔들리던 버스 안에서 읽던 삼중당 문고의 활자도 훨씬 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독서량은 오히려 버스 안에서 보다도 줄어 책을 덜 읽게 되었다.

대신 각 전철역마다 학교가 있고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이 어느 정도 규칙을 이루어 어느 학교 누구, 어느 동네 누구 하는 식으로 대충은 사람을 알아보게 되었으니 버스에 흔들리며 다니던 때와는 질적으로 향상된 호기심 어린 통학 시간이었다.

전철을 타게 되니까 통학 반경이 광화문에서 종로로 옮겨졌다.

그것도 학교 앞에서 인사동 화랑을 구경하며 조계사 앞으로 빠지는 길이 있었음에도 친구따라 강남 가듯이 일부러 인사동 고미술품가를 돌아 정일학원이 있던 학원가와 허리우드 극장이 있는 낙원상가를 기웃거리며 종로2가에서 종각까지 걸어 다녔다.

더운 여름 날 포플러 잎사귀가 시들시들해질 오후 3~4 시 무렵이면 종로의 대기는 소음과 공해로 뿌옇게 보이고 냉차 파는 아저씨의 냉차와 그 속에 담겨있는 수박 덩어리만이 딴 세상에 있는 빛나는 보석처럼 시원하게 눈에 들어 왔다.

그 찜통같은 길 위에서 우린 버스를 보내고 또 보내고 무슨 이야기가 그리 즐거웠는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서서 시간을 보내다 가로수에 우리의 우정을 증명하듯 이름을 새겨 놓고 10년 후 이 나무 앞에서 다시 만나지고도 했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집이 부천으로 이사를 했다.

공동학군이었던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추첨을 했는데 이번에는 서울 변두리 갈현동에 있는 고등학교로 배정이 되었으니 앞으로 다니는 길은 이제까지의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멀고도 먼 통학 길이 될 것이었다.

새벽에 집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부천역까지 와서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남대문 근처의 버스 정류장이 있는 출구를 찾아 나온 후 회차하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나왔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2년여 보내고 다시 서울 동대문구로 이사를 했으나 학교가 멀기로는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버스로 서울 시내를 관통해서 다니는 길은 지루할 정도였다.

대학은 우리 집 버스 종점에서 출발한 버스가 회차하는 동네인 용산구 청파동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시간표만 잘 짠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하는 시간 다툼과 버스를 갈아타는 수고로움이 없다는 정도였고 지나는 길에 있었던 청계천 고가차로는 춥고 음산한 겨울이나 땀 냄새나는 여름에도 청계천 평화시장의 복잡한 일상과 등짐을 진 지게꾼들이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오도 가도 못 하게 발을 묶어 놓기 일쑤여서 정차된 차안에 앉아 바라보는 희뿌연 건물 어느 창가에서 전태일이라는 청년을 본 것 같이도 느껴진다.

 

그렇게 다니면서도 지각은 커녕 늘 학교에 일찍 등교하는 축에 속했고 심지어 중학교 때에는 수위 아저씨가 교문을 열어줄 정도로 일찍 갔었던 기억이 있다.

결단코 내가 부지런해서는 아니었고 자칫 출근 시간과 맞물리면 ‘청량리 중랑교 가요~!’하는 안내양의 외침이 ‘차라리 죽으러 가요~!’로 들린다는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를 피하려고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서는 것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특한 것은 늘 밥을 한 그릇씩 뚝딱(울 엄마 표현에 의하면)먹고 다녔다는 것이나 기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갓 지은 밥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새벽마다 연탄아궁이에 밥을 올려 따끈따끈한 밥을 차려 주시고 김치를 안 먹는 입맛 요상한 딸 덕에 늘 오빠보다도 남동생보다도 더 신경을 써서 싸 주셨던 도시락은 우리 엄마의 정성이 극에 달해 늘 친구들의 환호를 샀었다.

원체 밖에서 매식을 하질 않아서인지 파는 음식이 이상하게 입맛에 안 맞아 엄마의 도시락은 내가 직장을 다닐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나는 늘 엄마는 저절로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지고 잠도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엄마는 늘 피곤하고 자고 또 자도 잠이 모자라는 자리인 것을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보고서야 알았다.

 

안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집에서 전철로 20분 거리에 있는 직장엘 다녔으니 그 짧은 시간이 오히려 차비가 아깝다 여겨질 정도로 내게는 전광석화와도 같은 찰나로 느껴졌다.

그러나 한창 돌아다니기 좋아 할 나이인지라 퇴근 후 곧 바로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는 서울 시내로 나가 친구를 만나는 날이 많았고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나, 오늘 서울 가서 아무개랑 만나는데 같이 만날 사람~’하는 식으로 한번 상경에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해서 내 친구들은 학교에 관계없이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지냈다.

안양에서는 오래 살았지만 직장은 늘 나를 피해 다니는지라 20분 걸리던 근거리에서 시작해서 점점 멀어 지더니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에는 안양에서 역삼역까지 다녔다.

결혼 후 잠시 집에 있었던 1~2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타고 다니는 내 출근길은 계속되었는데 안양에 아파트를 분양받고 IMF가 터지는 바람에 중도금 마련을 위해 이곳 남양주로 옮겨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계속 여기에서 출퇴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워커힐에 다니는 남동생이 직장과 가깝게 위치한 오남리에 결혼 전 미리 집을 사 둔게 인연이 되어 따라 들어 왔는데 첫날 버스를 타고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멀고 아득한지 과연 우리 집이 나타나기나 할까 싶게 두려웠던 며칠이 지나니 다시 새로운 길에 적응이 되고 산속으로 뚫린 길 같아 까마득한 출퇴근길이 이젠 공기좋은 녹음방초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주변의 산들부터 색이 달라지고 하늘이 우선 그 표정을 변화무쌍하게 보여주니 남양주 오남리에서 서초구 양재동까지 길은 멀어도 차창 밖 풍경으로 인해 심심하지 않았다.

상혁이를 낳고 안양의 아파트를 포기하고 약간 앞으로 나왔으나 먼 출근길은 여전했고 재작년 여기 퇴계원으로 이사 왔더니 이번엔 강남에 있던 회사가 구로 디지털단지로 옮겨가는 바람에 내 고달픈 출근길은 아직껏 끝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바늘에 실을 길게 잡으면 시집을 멀게 간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일부러 더 길게도 끼워보며 내심 먼 곳으로 시집가 서울 땅을 벗어나 보길 원했더니 목포가 고향인 남자를 만나게 되어 명절 때마다 고생을 사서하고 있다. 길위에서......

서울이 고향인 내게는 명절 때마다 고속도로위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지나가는 방송국 헬기에 대고 손을 흔드는 귀성객들의 모습을 뉴스 속 화면으로 보면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 서울의 명절은 스산한 가을바람처럼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었으며 더구나 일가친척이 모두 서울 안에 살고 있던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명절이 되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시골에 가서 농사짓는 것도 보고 싶고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것도 보고 싶고 산에 가서 산나물도 뜯어 오고 싶었는데 시댁이 있는 목포도 바로 목포역 앞 시내라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 꿈은 여태 이루지 못하고 있다.

결혼 한 첫 해 맞이한 추석에는 국도로 지나는 동네 어귀에 나붙어 있던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랜카드의 글귀를 보고 눈물이 글썽해져서 남편에게 물었었다.

"우리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기막혀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서야 내가 맹추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환영받고 있다는 그 감동은 두고 두고 오래 갔다.

그래서 모두들 고향을 찾는것이겠지...

그리고 한 동안은 우리가 무슨 행사 때마다 내려가는 고향길이 쑥쑥 잘도 빠지는 바람에 막히는 귀성 행렬이란 것은 이제 옛말이 되었는가 보다 했더니 안양 살던 무렵 어느 해 추석에는 19시간을 걸려 고향에 갔다.

오후에 안양을 출발해서 수원에서 밤을 지새고 오산에서 아침을 맞이하던 그 때 난 하룻밤내내 추석에 입히려고 뜨고 있던 하나의 가디건을 꿰매어 마무리하고 가슴팍에 수까지 놓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해 버린 11명의 오빠들을 위해 쐐기풀로 옷을 짜는 엘리제가 나오는 안델센의 동화를 떠 올리며 앞으로의 시간이 자못 흥미롭기도 했었다.

옆에서 밤새 자지도 못하고 운전하느라 피곤한 남편은 아랑곳 않고 드디어 나도 귀성 행렬에 들어섰다는 실감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해를 거듭하고 횟수를 더 하면서 다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려 고향에 내려가는 일은 없었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주변 풍경에 지방으로 가는 고속도로나 국도나 모두 비슷비슷해져 이제는 영 재미를 못 느끼게 되었고 단지 애들과 함께 낑낑대는 차 안이 답답할 뿐이다.

 

엊그제 추석에도 고향엘 다녀 왔다.

가는 길엔 우리 식구와 시숙님, 그리고 장조카, 이렇게 6명이 널널하게 시간적으로 여유를 부리며 내려갔는데 올라오는 길은 작은 조카 한 명을 더 태워 넓지 않은 공간에서 다리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한 채 16시간이 걸려 올라 왔다.

화산에서 분출 된 용암이 흐르듯이 발갛게 꼬리를 이루며 기어가는 자동차의 후미등이 어지럽게 아른거리건만 고향에 갔던 이틀 저녁을 친구와 술로 보내느라 잠도 부족한 하나 아빠는 눈이 빠져라 힘을 주고 그 무거운 눈꺼풀을 보는 내 마음은 혹시라도 졸려 할까 불안하고 그러면서도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잠깐 잠깐씩 눈을 붙였다.

목포에서 아침을 먹고 장성 산소엘 들렀다가 들어선 귀경길엔 휴게소와 도로 중간에 임시로 세워 둔 간이 화장실마다 차들과 사람이 엉겨 또 다른 정체가 생기고 버스 전용차선이 일반 차선보다도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차들은 계속 갓길 운전도 했다가 들어 왔다가 하면서 반바퀴라도 앞서 가려고 애를 써 보지만 몇 십분 후에 보면 다시 그 자리, 그 순서대로 서 있게 되니 천지 분간이 안 되는 암흑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매한 인간과 진배없는 것이다.

간신히 서울에 입성을 하고도 차량은 좀체로 줄지 않아 새벽 3시가 되어서야 Home Sweet Home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고단한 내 팔자에 대해 생각을 해 봤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부분의 인생을 길거리에서 소비하고 있는 내 인생이 바로 역마살 낀 팔자가 아닐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