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그러니까 아마 금요일일 것이고 날짜는 2월 3일이었을 것이다.
후배를 만나러 갔던 남편이 수제치즈라며 들고와서는 와인까지 권하니 슬몃 기분이 들떠서
두 모금을 연거푸 마셨는가 보다.
이름도 모르는 와인이지만 좋은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입맛에도 좋았다.
--흠, 이 와인은 괜찮은 것 같은데 치즈는 좀 싱겁다. 내가 좋아하는 맛이 아니야.
기껏 생각해서 가져온 치즈 하나에도 고맙다는 말보다 자기 주장을 펴는 아내의 성격에 헛웃음을 지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어쩌다보니 남편의 신세타령이 나왔다.
자기가 지금 입고있는 바지를 언제 빨았는지 기억이 나느냐고 한다.
--아,아,,, 그게 지난 번에 빨지 않았나?
과장하자면 자기가 지금 입고있는 바지 하나로 겨울을 나고 있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바지를 그렇게나 빨았건만 그럴 리가 없는데....
남편은 이번 겨울이 너무 추워서 다른 바지를 입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자기한테 너무 관심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럴 리가...그럴 리가...
아니 그건 순전히 남편 탓이라고 도리어 반박을 해본다.
왜냐면 비단 이번 겨울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면서부터 걷기를 하면서부터 때로는 달리기를 하면서부터
남편의 일상복은 트레이닝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늘 나는 바지며 기능성 옷들을 손끝이 알알하도록 빨고 있었는데 그 바지를 빨 때가 되었으면 빨아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저 묵묵히 입고 다녔느냐고 반박을 했다.
남편은 빨래통에 내놓았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 다시 걷어 입은 적도 있다고 하니 술기운 때문인지 민망함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게 내가 자기 바지 좀 사자고 그렇게나 얘기했잖아. 따뜻한 기모가 있는 바지가 그것 뿐이니 이런 사단이 나는거야.
취한 김에 또 그렇게 궁핍한 합리화도 시켰다.
사실 많이 힘들었고 지금도 무기력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가을부터 아버지 병원에 모시고 다니느라 내가 병원에 안 가는 날에는 두 분이 잘 다녀 오시려는지 걱정이 되고 나 대신 남편이 그 일을 하면 미안한 마음에 더 안절부절 못하고 허공에 붕 떠있는 기분으로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동생이 퇴근길에 늘 모시고 들어오는 것도 부모님 마음에는 불편하다하시고 한편으론 점점 쇠약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 치료를 포기하시고 편히 살다가셨으면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12월 한달은 그 뒷처리와 엄마의 마음을 살피느라 집안일은 등한시했던 것이다. 이제 좀 숨을 돌리려나하는 1월이 되니 갑작스럽게 엄마의 심리가 불안해져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는 눈치이다. 두 분이 계시다가 홀로 계시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클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조금이나마 적적함을 덜어드리고저 날마다 아침 7시면 전화를 드렸다.
딱히 할 말도 없지만 그 시간이면 보청기를 하고 내 전화를 기다리시는 엄마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꽉 잠긴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지고 제대로 된 식사도 안 하시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보니 정작 보살펴야할 내 가족,내 남편에게는 신경이 덜 쓰였나 보다.
총각시절 자취를 한 남편은 혼자서도 잘하는 편이다.
결혼하면서부터 그렇게 잘해 왔으니 나는 마음을 놓고 직장생활도 하고 기본적인 가사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이제 전업주부가 되었으니 달라졌어야 했건만 나는 여전히 남편에게 살가운 아내가 되지 못하였고 남편은 내심 살뜰한 아내를 기대했는가 보다.
남편에게 미안했고 옆에서 듣고있다가 조용히 아빠를 위로하는 딸아이 보기에도 부끄러웠다.
식구들이 모두 내가 우울할까 봐 신경 써주고 힘들까 봐 걱정해주는데 익숙하다보니 내가 해야 할 본분을 잊고 그저 무방비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와인은 반 이상 남았는데... 이제 그만 자야겠다고 정리를 하는 내 몸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속이 좀 울렁거리면서 머리가 핑 도는가 싶더니 바닥에 꽈당하고 머리를 찧었다.
그러고 잠시 후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남편의 눈에는 내가 주방에서 안방으로 들어오려는가 하더니 갑자기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고 꽈당소리만 크게 나더란다.
마침 자기 방에 있던 하나도 깜짝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하나는 겁이 나 울고 119를 부르거나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말에 나는 그 와중에도 술을 마셔서 넘어졌다는 이야기를 남들에게 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려 완강히 거부했다.
남편은 계속 내게 말을 시키고 나는 계속 괜찮다고만 하니 정신을 아주 놓기 전에 말을 계속 시켜야겠다고 느꼈는가 보다.
내가 누구야?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군데?
--누군지 안다고..
이름을 말해 봐.
--누군지 안다니까...
중간중간 말꼬리가 흐러지긴 했지만 대답은 하려고 애를 썼고 발음도 정확하게 하려고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자기야, 목포에서 엄마,아버지는 언제 다녀가셨어?
--으응, 작년에...
어이쿠. 며칠 전 일인데도 기억을 못하니 시간관념이 없어졌구나.
자기 아버지 장례식은 기억나?
--흑흑..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어?...
이 말을 듣고 옆에 있던 하나는 엄마가 충격을 받아 나쁜일을 잊어버리려는 단기기억상실에 걸린 줄 알고 깜짝 놀랐단다.
나는 그냥 자리에 누워 자고싶었는데, 침대로 옮겨주면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남편은 아직 움직이면 안된다고 내머리에 팔베개를 해준 불편한 자세로 40여분을 마룻바닥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왜 그럴까?
평소 술을 잘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왜 유독 복분자나 와인같은 술만 마시면 넘어가는 것일까?
지난 번 복분자 사건대도 그렇고 왜 그렇게 자기를 안타깝게 만드느냐는 남편의 한탄이다.
차라리 못봤으면 전해듣는 것으로 말텐데 두번 다 자기 눈앞에서 꽈당 꽈당 넘어가니 속상해 죽겠단다.
어지럽다고 말이나 하지 그런 낌새도 없이 넘어가니.......
지난 번에는 어지러워서 잠시 앉으려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지는 바람에 이를 닦던 남편이 재빨리 머리밑으로 발을 밀어넣어 충격이 덜했는데 이번엔 나혼자 안방으로 가려다가 선채로 뒤로 넘어갔으니 그 충격이 크긴 컸는가 보다.
창피한 마음이 커서 괜찮다고는 했지만 며칠동안 상당히 아팠다.
그래도 다가오는 화요일(2월 7일)에는 엄마의 철심제거수술이 있으니 병원에 들려야하고 걱정하실까 알리지도 않고 혼자 끙끙 앓았다.
괜찮은 듯 했는데 이번 주에 들어서는 날씨탓인지 머리도 묵지근하게 아프고 전체적으로 퍼져있었던 붓기가
한쪽으로 몰리면서 유난히 볼록한 혹이 생겨 톡하고 터질 것만 같아 터뜨릴 수 있으면 터뜨리는 것이 낫지않을까하는 생각도 슬슬 들었다. 남편에게 부탁하고 싶으나 기겁을 할 것이 뻔하니 그러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하나는 자기도 학교에서 쓰러졌다면서 실신하는 기분이 그런 것이로구나 한다.
3학년 교과서를 옮기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친구들이 모두 놀라 아우성을 쳤다니 나보다도 딸아이 걱정이 더 컸다.
그래서 하나와 함게 신경과에 갔다.
하나는 아직 어리고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날씨도 추웠으니 혈관이 수축되어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경우,,,,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웃었다.
와인 두모금에 넘어갔으니 그럴만 한가?
의사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슬쩍 농담도 잊지 않았고 어쨌든 머리가죽밑으로 주사바늘을 넣어 고인 피를 빼내긴 했다.
머리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왼쪽 손이다.
왼쪽 손가락에 감각이 무뎌진지가 한참이고 요즘들어 자구 물건을 놓치는 바람에 그릇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혹시 이러다가 중풍이라도 오는 것은 아닐가해서 상담했더니 척골신경때문인가 보다고 근전도 검사를 해보자고 했고 결과는 아리송.
척골신경에 이상이 생기면 지금의 나처럼 새끼손가락과 장지에 문제가 생기는데 검사결과 척골이 아닌 손목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손목에 이상이 있는 경우는 엄지손가락부터 마비가 온다고 하니 내 경우와는 또 맞지 않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기간은 오래되었어도 증세는 참을만하고 미약하기에 진료받기를 주저했는데 의사 말로는 방치할 경우 근육이 말라 완전히 마비가 온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진료를 받아보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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